5권 이야기를 계속 따라와준 독자님들께 감사합니다.
오늘부터 번역이 되는 대로 6권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6권에서는 작가와 아들의 성숙한 대화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상식이 달라 서로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들...
가을 추수가 끝나고 시간이 나는대로 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지속적인 관심 바랍니다.
1,2,3권은 이제 오늘 내일 출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책을 주문하여도 무방하리라 봅니다.
제6권 첫장
우리의 아이들을 교육하는 건 누구?
종합병원 진찰실 출입문에는 검진을 하고 있는 사람이 의학박사이자 아동심리학 전문의라고 알리는 푯말이 붙어있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추천들을 하기를, 푯말에 붙은 성과 이름의 이분은 자녀와 부모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있어 최고의 권위자라고 했다. 나는 시간상의 제약을 피하고자 일부러 맨 마지막 순에 예약을 한 터였다. 상담이 유용하다 생각되면 더 돈을 내고라도 내겐 중요한 대화를 더 연장할 셈이었다.
진료실 탁자에는 정년퇴직 나이쯤의 한 남자가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글자가 빽빽이 적힌 종이 장들을 정리하는 그의 모습에는 피곤이 역력했다. 의사는 나에게 앉으라고 권하고는 깨끗한 종이 한 장을 꺼내놓고 말했다:
- 듣고 있어요. 무슨 문제가 있지요?
아나스타시아와의 타이가 만남 이후 일어난 사건들의 긴긴 얘기를 피하려고, 나는 가능한 한 짧게 문제의 본질만을 얘기하고자 했다:
-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저는 한 아이와 관계를 잘 맺어야 합니다. 그 애는 곧 만 다섯 살이 되는데 제 아들입니다.
- 당신 아들과의 관계가 소원(疎遠)해졌나 보죠? – 피곤하고 무관심한 심리학자는 물었다.
- 뭐 관계라고 할만한 것이 애당초 없었어요. 아이가 태어나고 난 그 애와 어울려본 적이 거의 없어요. 일이 그렇게 됐지요. 젖먹이 때 한 번 본 적이 있고, 그 다음엔… 한 번도 얘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애는 나 없이 세상을 알기 시작한 것이지요.우리는 떨어져 살았어요. 그런데 곧 다섯 살의 내 아이와 만나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어요. 아이가 내게 가까워지게 하는 무슨 기법이 있지 않을까요? 그런 경우가 있잖아요: 남자가 아이가 딸린 여인과 결혼하여 그 아이와 잘 지내고, 또한 그에게 아버지와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잖아요.
- 물론 그런 기술이 없는 건 아니지요. 하지만 그게 항상 동일한 효과를 내는 건 아닙니다. 아이와 부모의 관계에선 많은 게 성격에 달려있고 개인 차가 크지요.
- 그건 알겠어요, 하지만 그 구체적인 기술들을 알고 싶군요.
- 구체적이라… 그럼 할 수 없지요… 가족을 대하게 되면, 에 그러니까 아이가 있는 한 여인도 가족이라 보아야 합니다, 가족의 생활양식을 가능한 한 깨트리지 마세요. 아들은 당신을 당분간 이방인으로 보게 될 것이고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선은 주위의 모든 것을 잘 살펴야 하고 또한 자신을 잘 살필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자신의 출현을 아이가 이전에 이루지 못한 소원이나 꿈의 실현과 연결시켜 보세요. 그 애 엄마한테 물어서 그 아이가 갖기를 소원했지만 사주지 못한 장난감이 있었는지 파악하세요. 그 장난감을 당신이 직접 사면 안됩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 아이와 당신의 어린 시절 얘기를 꺼내서 장난감 얘기를 해보세요. 당신이 그걸 갖고 싶었다고 말하세요. 아이가 대화를 이어가며 자기도 그런 걸 갖고 싶다고 말하면, 함께 상점에 가서 원하는 장난감을 사자고 제의하세요. 대화의 과정 자체가, 같이 가는 게 중요합니다. 사내녀석이 당신에게 자기의 꿈을 맡기고, 그걸 실현함에 있어 당신의 참여를 허용해야 합니다.
- 그 장난감 사례는 나에게 꼭 맞지가 않네요. 내 아들은 상점에서 판매하는 장난감을 보지도 못했으니까요.
- 이상하군요… 그러니까 그건 안되겠다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젊은 양반, 솔직해 봅시다. 이로운 조언을 듣고 싶다면, 그 아이를 당신한테 낳아준 여인과의 관계에 대해 소상히 말씀해 주세요. 그 여인은 누구지요? 어디에서 일하며, 어디에서 살지요? 그녀의 가족의 생활 수준은? 어떤 이유에서 당신은 말다툼을 하게 되었나요?
심리학자로부터 더 구체적인 자문을 듣기 위해서는, 아나스타시아와의 관계에 대해 얘기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 관계란 것이 내게도 분명치 않은 것이어서 난 심리학자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난 그녀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으며 다음의 내용을 얘기했다:
- 그 사람은 시베리아 오지(奧地) 중의 오지에 삽니다. 그녀와 만난 건 내가 상선 탐험을 하던 때로 우연이었지요. 페레스트로이카 초엽에 저는 시베리아에서 사업을 했습니다. 증기선으로 오비 강을 따라가며 오지에 다양한 상품을 나르고, 대신 물고기나 모피 혹은 자연에서 자라는 것들을 받아 가져갔습니다.
- 그렇구먼. 파라토프(Paratov)와 똑같네. 모든 사람들의 시샘 속에 시베리아 강을 떠돌며 주색을 즐겼다지!
- 주색이 아니라 일을 했어요. 사업가는 항상 신경 쓸 일이 넘치죠.
- 넘친다고 해두지요. 그래도 당신들 사업가들은 재미 볼 시간은 항상 있게 마련이지요.
- 이 여인과는 재미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저는 이 여인으로부터 아들을 갖고 싶었어요. 과거에도 아들을 갖고 싶었는데 시간이 흐르며 잊고 살았어요. 해가 지나고… 그러다 그녀를 보았을 때… 건강이 넘치고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지요… 지금은 대부분의 여자들이 왠지 힘이 없고 아프지요. 그런데 그녀는 건강하고 피는 꽃이었어요. 그래서 생각했지요, 아이도 건강하고 잘 생길 거라고. 그녀는 내 아들을 낳았어요. 나는 아이가 어려서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할 때 갔다 온 적이 있어요. 아이를 손에 안아는 보았지요. 그러고 한 번도 다시 어울린 적이 없어요.
- 왜 아이와 어울리지 않았지요?
몇 권의 책에 쓴 내용 모두를, 짧은 대화로 어떻게 이 사람한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아나스타시아가 타이가의 빈터를 버리고 아들과 함께 도시로 이사하기를 거부했으며, 나는 타이가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걸 어떻게 이 사람한테 설명할 수 있을까? 다름아닌 바로 그녀가 내가 아들에게 우리 사회의 장난감을 주지 못하게 했고, 심지어는 그와 어울리지도 못하게 한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매 번 여름 나는 타이가로 가서 아나스타시아와 나의 아들이 사는 숲 속의 빈터에 들렀지만, 결국엔 아들을 보지 못하였다. 매 번 그 아이는 아나스타시아와 함께 있지 않고, 이웃에 사는 그녀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한테 가 있었는데, 그곳은 끝이 없이 깊은 시베리아 타이가였던 것이다. 아나스타시아는 나를 데리고 그리로 가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아들과 대화하려면 우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매번 고집 세게 주장했다.
나는 어린애 보육 문제를 제기하며 나의 친지들에게 항상 같은 질문을 던지곤 했는데, 왠지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며 당황해 했다. 그 질문이란 건 단순한 것이었다:
- 자녀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나요?
결과적으로 밝혀지는 것은, 대화의 주제는 모두에게 한결 같다는 것이었다: << 와서 밥 먹어라… 잘 시간이다… 말썽부리지마… 장난감 치워… 숙제 다 했어?... >>
아이는 자라서 학교에 간다. 그런데 삶의 의미나 사람의 소명 혹은 그냥 그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없거나 그런 대화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가 되지 않았거나 앞으로 그럴 시간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으나, 결국은 그럴 시간을 놓치고 만다. 아이는 어른이 되니까…
그런데 우리 자신이 자기 아이들과 심각히 얘기를 나누려 하지 않는다면, 누가 아이들을 교육한단 말인가?
그런데 왜 아나스타시아는 내가 내 피붙이 혈육과 어울리도록 허락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무엇을 걱정했는지 혹은 무슨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조치를 취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하루는 문득 이렇게 묻는다: << 블라지미르, 당신, 아들과 만나서 얘기를 나눌 준비가 되었다고 느껴? >> 만나고 싶다고 대답은 했는데, <<준비>>되었다는 소리는 나오질 않았다.
지난 수년 내내 나는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 대해 찾을 수 있는 책은 모두 찾아 읽었다. 나는 책을 쓰고, 여러 나라에서 독자대회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그간 내가 최고 관심을 기울였던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즉 자녀 교육과 자녀의 어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쓴 게 거의 없고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책에 쓰여있는 자녀 교육에 대해 수많은 조언을 궁리했지만, 무엇보다도 아나스타시아의 말이 자주 생각났다: << 자녀 교육이란 자신을 교육하는 것이야. >> 난 오랫동안 이 말뜻을 몰랐다. 하지만 결국엔 굳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의 아이를 교육하는 것은 부모의 훈계도, 유치원도, 학교도 대학도 아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은 삶의 양식이다: 우리의 삶의 양식, 우리 사회 전체의 삶의 양식이 그렇다. 부모나 학교의 교사나 기타 다른 교육기관에서 무슨 말을 하던, 어떤 지혜로운 교육 시스템을 적용하던, 아이들은 자기들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르는 생활양식을 따를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녀 교육은 자신의 세계관과, 내가, 나의 부모가, 그리고 사회 전체가 어떻게 사느냐에 전적으로 달려있는 문제인 것이다. 병들고 불행한 사회에서는 오직 병들고 불행한 아이들이 태어날 수밖에 없다.
- 당신 아들의 엄마와의 관계를 소상(昭詳)히 밝히지 않는다면, 선생한테 효과 있는 자문을 해주기 어렵소. – 오래 지속된 막간의 침묵을 심리학자가 깨고 나섰다.
- 그 얘길 하자면 길어요. 짧게 얘기하자면, 어찌하다 보니 난 몇 년 동안 아들하고 어울리질 못했어요. 그게 전부요.
- 좋아요. 그렇다면 말해봐요, 그 시간 내내 당신은 아이의 엄마를 물질적으로 어떻게든 도왔나요? 사업가에 있어 물질적인 도움은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 표시라 할 수 있지요.
- 아니요, 돕지 않았어요. 그녀는 필요한 모든 게 다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 그렇다면 그녀는 아주 부자인가 보죠?
- 그냥 모든 게 다 있어요.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는 탁자에서 벌떡 일어나 빠르게 쏟아냈다:
- 그녀는 시베리아 타이가에 삽니다. 외톨이 삶의 양식을 따르고요. 그녀의 이름은 아나스타시아, 당신 아들은 볼로쟈[1]라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블라지미르 니콜라예비치. 난 당신을 알아보았소. 당신의 책을 읽었지요. 그것도 여러 번.
-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