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은 당신과 내 앞에
솟아오르는 태양이 커튼에 가려진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침대에 내려 앉는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참 잘 잤다! 내 속에선 무슨 힘이 솟아 오른다. 체조나 몸을 움직이는 운동이 하고 싶다. 기분은 그야말로 최상이다. 그런데 부엌에서는 식기가 딸가닥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어. 설마… 아나스타시아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나? 주방기구며 가스렌지 키는 걸 모를 텐데. 도와 주어야겠구먼” 난 체육복 차림에 부엌문을 열었다. 아나스타시아를 본 나는 몸 속에서 무슨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타고 흐르는 걸 느꼈다.
난 처음으로 시베리아 외톨이 아나스타시아를 시베리아 숲이나 타이가 빈터, 그리고 해변이 아닌 보통 도회지 여자들에게 있어 가장 익숙한 상황인 부엌에서 본 것이다. 그녀는 가스렌지에 몸을 숙이고 불꽃을 조정하려 애를 먹고 있었다. 손잡이를 돌려 불의 세기를 크게 혹은 작게 조정하려 했으나 낡은 가스렌지는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았다.
부엌에 있는 아나스타시아는 보통 여자와 완전히 똑 같았다. 왜 어제 밤에는 무릎을 끓고 저 여인을 겁나게 했지? 술을 너무 마셨거나 피로가 심했었나 보다.
아나스타시아는 나의 응시를 느끼고 내 쪽으로 돌아섰다. 그녀의 한 쪽 뺨에는 밀가루가 조금 묻어있고 살짝 땀이 솟은 이마에는 묶은 머리에서 머리터럭이 흘러내려 달라붙어있다. 아나스타시아가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환상적인 목소리…
- 멋지고 선한 새로 시작되는 하루 축하해, 블라지미르. 아침 식사가 거의 다 준비됐어. 조금 남았어. 우선 좀 씻어. 그럼 준비가 끝날 거야. 우선 씻어, 염려 말고. 아무것도 망치지 않을 게. 다 파악했어…
난 욕실로 바로 가지 못하고 마치 홀린 사람처럼 제자리에 서서 아나스타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만난 지 5년 만에 처음… 이 여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아름다움이란 말로 형용키 어렵다. 뺨에 밀가루가 묻었어도, 머리를 하지 않고 그냥 한 다발로 묶어 맸어도, 그리고 옷도 유행을 따르지 않는 단순한 것이어도,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너무도 아름답다.
욕실에 들어가 면도에 집중해도, 샤워를 하는 데도, 아름다운 아나스타시아가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욕실에서 나와 방으로 갔다. 이미 정돈해 놓은 침대에 앉아 난 부엌으로 가지 못한다. 아나스타시아에 대한 나의 생각은 아직 들뜸으로 가라앉지 않는다.
이 여인과 만난 지 5년이 지났다. 시베리아 타이가 외톨이 여인. 5년이라… 그간 내 삶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뜸하게 보지만 그녀는 항상 내 곁에 있는 듯하다. 내가 내 딸과 좋은 관계를 복원토록 도와준 것도 바로 이 여인이다. 지금은 그 관계가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다. 그간 5년 간 한 번도 집에 간 적은 없지만 아내한테 전화한 적은 있고 아내의 목소리에서 느끼건대, 그 목소리는 화와 차가움을 담고 있지 않다. 가족이 다 무난하다고 말한다.
아나스타시아… 내 병을 고친 것도 그다. 의사들이 못 한 걸 그녀는 해냈다. 나는 죽을 지도 모른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녀가 나를 고치고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인세로 큰 돈을 제안한다. 하지만 책은 아나스타시아의 말이다. 그녀는 언제나 다정다감하다. 결코 화내는 일이 없다. 그녀에게 나의 잘못으로 화를 내도 그녀는 화낼 줄을 모른다. 그녀는 내 인생을 뒤집어 놓았다. 좋은 쪽으로. 아들을 낳아 준 것도 그녀다! 평범한 상황은 아니나, 내 아들은 타이가, 그녀의 빈터에서 산다. 거기서 아들은 엄마와 함께 좋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 선하다. 그녀에게 무엇이든 좋은 말을 하고 그녀를 위해 무언가 좋은 것을 해주고 싶은데, 그런데 무엇을 할 수 있지? 그녀에겐 필요한 게 없다. 신기하게도, 내가 세상의 반을 가졌다 해도 그녀에겐 그 보다 더 많이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녀에게 무엇이든 선물을 하고 싶었다. 이미 오래 전에 진주목거리를 그녀에게 선사할 요량으로 사놓고 있었다. 인공이 아닌 진짜로. 굵직굵직한 알이다. 지금 다가가서 선사해야지. 옷 가방에서 갑을 꺼내 열고 거기서 진주구슬을 꺼냈다. 그리고 바로 부엌으로 가지 않고, 대신, 왠지 옷을 갈아입었다. 체육복을 벗고 바지와 하얀 와이셔츠에다 넥타이까지 맸다. 그리고 나서 바지주머니에 진주구슬을 넣었다. 그런데 왠지 떨려서 부엌으로 가지 못한다. 잔뜩 멋을 부린 채 창가에서 서성인다. 그러다 결국 용기를 냈다. “어쩌자는 거야. 바보처럼 떨 필요 없잖아” 그리고 부엌으로 향했다.
아침 상을 봐 놓고 앉아서 기다리던 아나스타시아가 일어서서 맞는다. 그녀는 이미 머리를 단정히 만진 상태다. 일어서서는 아무 말도 않고 잿빛이 도는 파란 눈으로 나를 다정히 바라본다. 나는 서서 할 말을 모른다. 그러다 왠 일인지 존댓말로 말했다.
- 안녕하세요, 아나스타시아. – 존댓말을 하고 나니 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눈치채지 못한 듯 신중히 대답한다.
- 안녕, 블라지미르, 앉아요. 당신 식사 해야지.
- 어, 앉을 게… 먼저 당신한테 말할 게… 말할 게 있어… 그런데 할 말이 생각이 안 났다.
- 얘기해, 블라지미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나스타시아에게 바짝 다가가서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그러자 불에 타듯 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나스타시아의 뺨에는 홍조가 밀려오고 눈썹은 보통 때보다 빨리 깜빡였다. 나는 결국 내 목소리가 아닌 무슨 억눌린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 아나스타시아, 이건 모든 독자들을 대신한 거야. 많은 독자들이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어.
- 독자님들 모두에게 크게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해요. – 아나스타시아가 조용히 얘기했다.
그때 난 다른 뺨에도 얼른 키스를 하고 말했다:
- 이건 내가 하는 거야. 당신은 무지무지 착하고 아름다워, 아나스타시아. 아나스타시아,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당신이 있어서 고마워.
- 내가 아름답다고, 블라지미르? 감사해… 당신 그리 생각해…?
아나스타시아도 긴장이 역력했다. 난 이제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주머니에 든 진주 목걸이가 생각났다. 얼른 주머니에서 꺼내서 연결고리를 풀기 시작했다.
- 이건 당신한테 주는 선물이야, 아나스타시아. 이건 진주… 진짜야… 인조 아니야. 당신이 인조 안 좋아하는 거 알아. 이건 진짜 진주야.
고리는 풀리려 하지 않았다. 확 잡아 당기니 줄이 끊어지고 줄에 꿴 진주 알들이 부엌 바닥에 뿌려져 사방으로 굴러 흩어졌다. 나는 쪼그려 앉아 주워 담으려 했다. 아나스타시아도 주워담는데 나보다 빠르다. 그녀가 손바닥에 구슬을 담는 걸 보았다. 한 알 한 알 유심히 바라본다. 난 그녀의 움직임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기대어 넋 나간 듯이 바라본다. 앉아서 생각한다. 이 부엌의 장면은 얼마나 진부한가. 그런데 내 마음은 얼마나 특별하고 훌륭한가. 왜 그렇지? 그건 아마 부엌에 아나스타시아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녀가 바로 옆에 앉아있다. 그런데 그녀를 껴안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5년 전 타이가에선 뭔가 좀 이상한 외톨이로 보였었는데, 바로 그 여인이 지금은 하늘에서 잠시 내려온 별로 보인다. 그녀는 바로 곁에 있다. 아, 그 별은 다가갈 수 없는 별. 세월… 나의 지난 세월… 나는 눈을 떼지 않고 아나스타시아가 일어서서 식탁 위에 놓인 접시에 주워 모은 구슬을 담는 걸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나는 여전히 마법에 걸린 듯 부엌 바닥에 앉아 몸을 벽에 기대고 그녀의 회색 빛 푸른 눈을 계속 응시한다. 그녀는 다정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 당신은 바로 곁에 있어, 아나스타시아. 그런데 당신을 지금 만질 수가 없어. 당신은 내게 먼 하늘의 별 같은 느낌이야.
- 별? 그런 느낌이야? 무엇 때문에? 자, 당신 곁에, 그 별은 평범한 여자가 되었어.
아나스타시아는 얼른 내 곁에 다가와 바닥에 앉았다. 양손을 내 어깨에 얹고 머리를 기댔다. 나는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었다. 내 심장은 더 세게 요동친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선 타이가 내음이 난다. 그녀의 숨은 따스한 바람처럼 꽃의 향기로 의식을 몽롱케 한다.
- 아나스타시아, 당신은 왜 내가 젊었을 때 나타나지 않았어? 당신은 얼마나 젊어. 내 나이는 벌써 얼마. 거의 반 세기를 다 살았어.
- 유랑하는 당신의 마음에 내가 파고 드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어. 그러니 이젠 나를 자신으로부터 쫓지마.
- 나는 곧 늙어, 아나스타시아. 나의 삶은 곧 끝이나.
- 늙는 동안 당신은 가문의 나무를 심고 다른 사람들과 멋진 미래의 마을을, 기적 같은 동산을 기초할 시간이 있어.
- 노력할게. 그런 동산에서 조금밖에 살 수 없다니 아쉽다. 동산이 자라나려면 세월이 걸릴 텐데.
- 기초를 다지면 늘 거기에서 살게 될 거야.
- 늘?
- 물론이지. 당신의 몸은 늙고 죽어도 영혼은 날아올라.
-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날아오른다… 나도 그건 알아. 영혼이 날아오르면 그거로 모든 게 끝이야.
- 우와, 오늘 정말 멋진 날이야! 그런데 왜 당신은 즐겁지 않은 미래를 짓지, 블라지미르? 왜 스스로 짓느냐고?
- 그건 내가 짓는 게 아니야. 그게 객관적 현실인걸. 늙으면 모두가 죽어. 나의 착하고 아름다운 몽상가 당신이라도 다른 걸 생각해낼 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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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저작권 관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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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찬란한 이날, 우리는 바다에서 멱을 감고 사막처럼 황량한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겼다. 저녁에 아나스타시아는 떠났다. 언제나 그랬듯이 자기를 배웅하지 말라 했다. 나는 발코니에 서서 그녀가 아파트 단지 내 인도에서 걷은 걸 바라보았다. 머리에는 머플러를 쓰고 단순한 옷에 스스로 만든 아마포 손가방을 들고 있다. 온 나라를 위해 멋진 미래를 지은 여인이 지나는 행인들 사이에 섞여 눈에 뜨이지 않게 걷고 있다. 그 미래는 반드시 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꿈을 실현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살게 되리라.
귀퉁이를 돌아서다 말고 아나스타시아는 발걸음을 멈추고 내 쪽으로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다. 나도 아나스타시아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했다. 그녀의 얼굴을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웃고 있을 거라 확신한다. 아나스타시아는 좋은 것만 믿고 짓기 때문에 항상 미소를 짓는다.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나도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속으로 속삭였다: << 고마워, 당신, 나스�카 >>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