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과 답변
나는 아나스타시야의 프로젝트에 몰입했다. 매일 그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옹호하고, 비아냥대는 것을 막고, 회의론자들의 의심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겔렌지크 시, 그리고 모스크바 시 문학인의 전당(殿堂, Tsentral’nyi dom literatorov)에서 치러진 독자대회(讀者大會)에서도 이 얘기를 했다. 참석자는 총 2천 여명이 넘었고, 그 중에는 CIS 국가(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독립국가연합: 소련이 붕괴되고, 소련을 이루던 15개 공화국 대부분이 참여한 상호협의협력기구.
프로젝트에 대한 주요 관심사항들과 회의론자들의 지적,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답변을 여기에 소개한다. 나의 답은 아나스타시야의 주장과 나 스스로의 신념 그리고 그 동안 모은 자료들에 근거한 것이다.
질문: 현대 세계에서는 어느 나라도 세계경제체제 밖에서는 살 수 없고, 대량생산시설이 전제되어야 하며, 시장정보, 금융의 흐름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선생은 경제교육을 못 받은 듯 하군요. 선생의 제안은 소규모 생산에 중점을 두자는 것인데, 그러면 주류에서 멀어지고, 나라의 경제를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답변: 사실 저는 경제교육을 받지는 못했습니다만 대규모 기업과 공장이 한 나라의 경제에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다는 데는 선생의 말씀에 절대 동감입니다. 한편, 대규모 공장은 시장에서 수요가 있는 제품을 생산하는 경우에 한해서 국가에 이롭다는 점, 선생도 동의하실 겁니다. 우리나라에선 흔하게 있고, 다른 나라에서도 없지는 않은 경우이겠지만 대규모 기업이 가동을 중지하면 손실이 발생합니다. 국가는 근로자에게 실업수당을 지급할 부담을 안습니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쥐꼬리만한 수당을 받으며 힘들게 삶을 꾸려갑니다. 이들은 출구를 모릅니다. 회사에서 일해서 먹고 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를 모릅니다. 이런 때에 한가히 난 시간을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가원은 주거와 즐거운 여가만을 위한 공간이 아닙니다. 가원은 대기업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높은 소득을 올리는 공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국가는 대규모 혹은 중소기업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정은 국가의 근본을 이루는 한 부분입니다.
국가 경제의 위기 상황에서 가원은 든든한 배후, 보험증권이 될 수 있습니다. 각 가정이 궁핍하지 않은 삶을 스스로 영위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자유가 없다면 개인의 자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근로자 가족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 가족은 급여를 주는 고용자, 혹은 난방, 상수, 전기를 공급하는 공공서비스 기관에 목을 매야 하며, 식품 및 서비스의 공급 또한 그 가격에 의존해야 합니다. 가족은 이 모든 것들의 노예이며, 이런 가정에서 어린 아이는 노예 근성을 갖고 태어납니다.
질문: 러시아는 산업이 발달한 핵 보유 강국입니다. 그래야만 러시아는 자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온 국민이 흙에서만 일을 한다면 나라는 농업국이 될 것이고, 침략자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답변: 모두가 자기 땅에서만 일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은 점진적으로 진행될 거시고, 그 과정은 스스로 조율될 것입니다. 나라의 힘은 그 나라가 보유한 핵탄두의 숫자에만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품질 좋은 식량이 충분한가를 포함한 전반적인 경제 상황도 중요합니다. 사람에 필요한 식량이 나라에 충분치 않다면, 자연 자원과 무기를 팔 수밖에 없을 것이고, 가상의 적의 무력을 키우게 될 것입니다.
제가 제안하는 프로젝트는 나라의 경제를 튼튼하게 하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서 과학, 산업이 더 발전할 수 있게 하고, 더 전투력이 강화한 군대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줍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러한 생활 양식이 널리 정착된다면 다른 여러 나라 사람들도 여기에 흥미를 보일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적대적인 나라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런 나라에서도 사람들은 러시아 사람들처럼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고 싶어할 겁니다. 이 프로젝트가 여러 나라에서 시행된다면 그건 여러 민족들의 평화로운 공존의 시발을 의미할 것입니다.
질문: 러시아의 여건이 좋은 지역에서는 이 프로젝트를 시행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체츠냐[1]처럼 역사적으로 깡패 집단인 공화국에서도 이 프로젝트가 실현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 아닐까요?
답변: 소위 “뜨거운 감자”라 불리는 전투 지역에서 사회적 긴장을 완화하고, 전쟁을 완전히 종식하는 것 - 이 프로젝트는 그럴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게 순진한 생각이라 보지 않습니다. 충분히 실천 가능합니다. 북 카프카스 지역, 그 중에서도 체츠냐를 예로 든다면, 군사적 충돌의 근저에는 이 공화국에 매장되어있는 석유, 그리고 권력, 돈을 손아귀에 쥐려는 몇몇 무리들 간의 싸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뜨거운 전투 지역들의 일반적인 특징이 다 그렇습니다. 역사적으로도 항상 그랬습니다. 체첸 전쟁에 많은 인구가, 특히 남자들이 투입된 이유는 왜 일까요?
체첸 공화국에는 소수의 무리들이 소유하고 있던 불법 석유정제회사들이 수백 개나 됩니다. 이 분야에 고용된 사람들 수만 해도 수만이 됩니다. 국가 질서가 잡히면, 이 사람들은 실업자로 밀려나게 되고, 그 가족은 생산수단을 잃게 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자기 일자리를 유지하면서 어렵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군벌들의 편에 서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군사작전에 참가하면 실업수당과는 비교가 안 되는 포상금이 나왔다는 건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 결국, 일반 게릴라들이 전투에 참가하는 행위는, 경찰이나 러시아 군장교와 마찬가지로 그냥 직업이었던 것입니다. 보수는 더 좋았습니다. 때문에 여러 게릴라들은, 전쟁의 종식은 자기 가족의 생존과 안녕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체츠냐보다는 상황이 나은 지역에서도 실업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체츠냐에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부가 대규모 자금을 체첸 공화국에 투입하여 수많은 공장을 짓고 희망자 모두가 일자리를 갖도록 해준다고 가정해봅시다. 이때에도 급여 수준에 대한 문제는 있습니다. 체첸 사람들을 위해 급여 수준을 특별히 높게 책정한다면, 온 러시아가 체츠냐를 위해 일하는 꼴이 됩니다. 소요되는 자금을 납세자들이 전부 부담해야 할 테니까요. 이 경우에도 더 많은 돈이 용도대로 쓰이지 못하고 어디론게 새게 될 것입니다. 투여 자금을 최종 사용처에 쓰는 일은 아직까지 미결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그대로 있고 비용만 대폭 확대될 것입니다. 체츠냐는 농업생산의 적지입니다. 우리나라에 “가원”법이 이미 시행되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어떠한 침해가 있어도 국가가 가원을 보호한다고 가정합시다. 체첸 가족이 가원을 지을 땅을 받습니다. 거기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배타적으로 그 가족만의 소유이며 미래 세대의 소유입니다. 그것으로 궁핍하지 않은 생활과 삶이 보장됩니다. 폭탄이 날아다니고 폭정이 아닌, 훌륭한 동산, 스스로 짓고 가꾼 조그마한 조국에서 살게 해줍니다. 이런 가정은 그런 삶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국가에 저항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 나라와 대적하여 싸우는 것보다 더 맹렬하게 그 나라를 수호할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한 나라라면 자기 가문의 터전을 필사적으로 지키듯이 지킬 것입니다. 체츠냐를 그런 나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어떠한 침해자도, 어떠한 민족적인 차별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험목적에서라도 체츠냐에 그런 마을을 폭넓게 조성한다면, 체츠냐라는 이름의 뜨거운 전투지역은 러시아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하고 지구상에서도 아주 의미 있는 성스러운 곳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모든 게 180도 달라질 것입니다. 아나스타시아가 범죄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얘기해줄 때, 저도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삶은 그녀가 옳았음을 계속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체첸 공화국에서 온…
겔렌지크 시에서 개최된 독자대회(大會)에 러시아 및 CIS 각 나라로부터 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가했습니다. 너를 무엇보다도 놀라게 한 것은, 체첸 대표단이 그 자리에 참석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대회에 누구를 특별히 초청한 일은 없었습니다. 체첸 사람들은 스스로 찾아 왔습니다. 나중에 나는 그 중 몇 명과 별도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금 우리를 체첸 얘기를 하고 있지만, 우리 나라 다른 지역에는 범죄가 없습니까? 있습니다. 별의별게 다 있습니다. 범죄를 낳는 요인의 하나는 실업(失業)입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이 우리 사회에 적응하도록 우리는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아나스타시아의 프로젝트는 이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질문: 러시아에서 희망 가족 모두에게 1ha씩 나눠준다면 땅이 부족할 것입니다. 새로 태어나는 새 세대에게는 모자랄 게 분명합니다.
답변: 흙에서 일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지금 더 큰 문제입니다. 황무지나 경작이 어려운 땅이 아닌 보통 농지를 얘기하는 겁니다. 새 세대를 말씀하시는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출생보다 사망이 더 많습니다. 국가통계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 인구는 매년 75만 명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새 세대가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입니다.
5층 아파트에 사는 한 가족 또는 사람이 차지하는 면적이 텃밭이 딸린 개인 주택을 가진 가족 혹은 사람보다 적다고 저도 처음에는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몇 층에 살던 흙에서 자라는 모든 것을 매일 음식으로 취합니다. 흙에서 자라는 것들을 공급하려면 도로, 자동차, 창고, 가게가 필요하고, 이것들 모두가 땅을 차지합니다. 사람이 땅을 버렸건 아니면 아예 땅에 대한 생각이 없건 상관없이, 땅은 그에게 매 순간 봉사하고 있는 것이죠.
나는 상기한 질문에 대해서 구체적인 수치를 근거로 대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그 수치를 찾을 수 있었고 여기에 인용코자 한다.
러시아 연방 국토 면적: 러시아 연방 전체 면적은 17억 9백 8십만 헥타르이다. 농업에 이용할 수 있는 토지[2]는 6억 6 7 70만 헥타르이다. 1996년 초 기준, 총 농지면적은 2억 220만 헥타르이고 총면적 대비 13%이다. 그 중 경지(耕地)면적은 1억 3020만 헥타르이고 비중으로는 7.6%이다.
러시아 연방 인구는 금년 기준 1억 4700만 명이다. 수치가 보여주듯 희망하는 모든 가족에게 1ha의 땅을 분배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문제는 그 반대다. 우리나라 인구 감소는 위기적 상황이다. 전문가들이 내놓고 있는 전망치는 이러하다.
현재의 추이에 근거하여 작성한 2000-2045년간 러시아 인구현황의 특징: 15세 이하의 인구는 절반으로 줄고, 노인 인구는 1.5배 증가할 것이다. 인구를 다시 충원할 능력은 사실상 소진될 것이다.
우리나라 경지의 질(質)도 또한 문제입니다. 토양층의 파괴가 대규모 면적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국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러시아 농업용 토지 중, 침식되었거나 그런 위험이 있는 면적은 전체의 63%인 1억 170만 헥타르입니다. 최근 50년간 침식의 속도는 30배나 빨라졌고, 그 속도는 70년대 초 이후 특히 심합니다. 유엔의 FAO(Food and Agricultural Organization: 식량농업기구) 전문가 평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침식 확산 속도에서 세계 10개국 안에 들며 2002년 쯤이면 농지의 75%가 침식당할 것이라 합니다. 우리나라 토양에 대한 더 자세한 통계는 참담할 뿐입니다. 이 책 말미에 부록으로 싣습니다.
위에 인용한 수치들을 접하고 나니, 이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나스타시아의 프로젝트는 우리나라 토지에 저질러지는 야만적 행위를 종식시킬 수 있습니다. 효과가 있고 이행이 가능한 유일한 대안이 바로 이것뿐입니다. 그건 자연 스스로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투자를 요구하지도 않으며, 환경, 난민, 실업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고, 지금 현재 우리가 토지를 대하는 태도로 인해 우리 후손들이 안게 될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보다 더 효과적이고 이행 가능한 프로젝트가 자연에 존재할는지도 모릅니다. 있다면 누구든 그걸 대중에게 공개하길 바랍니다. 농업생산력을 복구하는데 거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그만한 돈이 나라에는 없습니다. 더 슬픈 사실은,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오는 등 설령 돈이 있다 한들, 땅은 좋아지지 않고 더욱 나빠질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두엄은 모자라고 화학비료를 땅에 쏟아 부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돈은 나중에 이자를 붙여 갚아야 할 것이고 땅은 점점 더 나빠져서 자라나는 세대가 그 문제를 떠안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아나스타시아의 프로젝트를 끝까지 지켜낼 것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관료들에게 타이가 외톨이는 아무런 영향력도 없습니다. 나도 농업문제 전문가가 아니어서 똑똑한 정치인들에게 그 효과를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행동할 것입니다.
독자들 중 누가, 정교하고 교묘한 국가 메커니즘을 잘 이해하셔서, 비중 있는 정치인에게 아나스타시아 프로젝트의 효율을 전문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마, 이 책이 해당 분야의 과제를 책임지고 있는 권력기구에 들어갈 수도 있겠습니다. 가원 짓기를 희망하는 사람 모두의 이름으로 이런 분들에게 다시 한번 호소합니다. 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희망자 수는 수백만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 사람들의 이름으로 아래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망하는 바입니다.
법제 차원에서 토지문제를 해결하여, 우리나라 희망자 가족 모두에게 1헥타르의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한다.
희망자 가족 모두가 가원을 세워서 잘 가꾸고 자기의 조그마한 조국을 사랑으로 보살필 수 있게 한다. 큰 조국이란 결국 작은 조각들의 합이므로 큰 조국도 더 아름답고 행복해질 것이다.
질문: 우리나라의 환경문제는 전국적으로 심각한 지경입니다. 위기적 국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다른 환경단체들이 그러는 것처럼, 환경보호 문제를 전국 차원에서 다루고 나중에 각자가 가원을 짓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답변: 많은 단체들이 환경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다고 선생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고 위기적 국면에 있다면, 걱정 하나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거 아닐까요? 잘 가꾸어진 가원 하나에서 자라나는 여러 나무들과 훌륭한 동산을 상상해봅시다. 단 하나의 낙원 같은 동산입니다. 크기는 1헥타르이고요. 나라나 우리 별 지구의 환경을 바꾸는데 가원 하나로는 물론 부족합니다. 하지만 수백만 개의 그런 동산을 상상해보면 온 지구가 꽃피는 낙원 동산입니다. 출발은 각자가 동산을 짓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총체적 걱정에서 총체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질문: 자기 소유의 땅 1ha만 있으면 실업자 가족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생각이시라면, 요즘 시골은 왜 그렇게 활기가 없지요? 시골 사람들은 땅이 있어도 굶주리고 있거든요?!
답변: 그 현상을 같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 전에 몇 가지 질문을 추가해야겠습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기들이 소유한 4-500 평방미터의 땅이(러시아 사람들이 가진 다차의 크기가 대개 그 정도임: 역주) 물질적인 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반면에 시골 사람들은 한 2000 평방미터의 땅이 있으면서도 “우리는 배고파요, 거지에요” 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죠? 우리가 잘 사는 것은 깨달음의 정도에도 의존하는 것 아닐까요? 시골 사는 사람 대부분이 도시에서만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이 시골을 버리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과거 우리의 선전선동에도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50년대, 60년대 언론에서 열렬히 찬양하던 문구를 상기해볼까요. 누구를 영웅시 했나요? 광부, 벌목꾼, 기계공, 조종사, 선원… 등등 이었죠. 도시의 풍경을 대규모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 기둥을 담아 그렸지요. 가끔씩은 콜호즈(집단농장:역주) 농부들을 관대하게 묘사하기도 했지만 자기 땅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부정적으로 그렸습니다. 심지어는 시골에서도 도시형 집을 지었고 또 그렇게 함으로서 사람들이 자기 소유의 텃밭을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공공의 농지에서만 일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인도의 “아우로빌”과 똑 같이요: “흙에서 살고 일할 수는 있으되, 땅은 절대 네 것이 될 수 없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서글픈 현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농촌의 빈곤은 국민 전반의 빈곤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정치인들과 언론매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단골 주제입니다. 하도 그래 대는 바람에 세뇌가 될 지경이에요. “시골 사람은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어”. 잘 사는 복지의 정도가 자기 자신한테 달려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 유리한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 희망을 버려. 나만이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 수많은 정치인들이 표밭을 일구며 그렇게 말합니다. 가난하고 구차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계속 그들을 믿으세요. 저는 가난해지는 법이 아니라 부자가 되는 법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자기의 땅 조각이 있으면 가난하지 않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저는 답합니다. 살 수 있습니다! 여기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1999년 제가 아는 한 사업가가 “아나스타시야”를 읽고 저를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타이가에서 아나스타시야가 차린 음식 상과 거의 똑같이 차릴 수 있다며 저의 흥미를 돋우었습니다. 제가 거기 갔을 때 식탁은 아직 비어이었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얘기를 나누었고, 사업가 안드레이라는 친구는 시계를 쳐다보고 누군가가 좀 늦고 있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곧 그의 운전사가 두 개의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식탁에 토마토, 오이, 빵, 그 외 여러 가지가 올랐습니다. 실내는 온통 황홀한 냄새로 그득했습니다. 여인들 몇몇이 불과 몇 분 만에 상을 훌륭히 보았습니다. 펩시 콜라가 아닌 러시아 민속음료 크바스(발효한 시큼한 맛이 나는 음료: 역주)를 마셨습니다. 프랑스 코냑이 아닌, 자기 집에서 담근 와인, 그리고 무슨 약초로 담근 술을 마셨습니다. 토마토와 오이는 타이가 아나스타시야 것만은 못했지만 슈퍼나 재래시장에서 파는 것보다는 훨씬 맛이 있었습니다.
“이거 다 어디서 난 거요?” – 난 좀 덜 떨어진 질문을 했고 그로부터 이런 답을 들었습니다.
한 번은 랴잔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도중, 안드레이의 운전기사가 길가의 장터에서 차를 세우고 소금에 절인 오이와 토마토를 1리터짜리 병 하나씩 샀습니다. 조그만 간이식당에 차를 세우고 점심을 때우기로 했습니다. 식사 후 안드레이는 운전기사가 차를 돌려 길가 장터로 되돌아 가도록 했습니다. 파는 할머니가 갖고 있던 것 전부를 샀고 자기 지프차로 할머니를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조그만 텃밭이 딸린 낡은 오래된 집에 살았습니다. 할머니의 집은 길에서 15km 떨어진 조그만 마을에 있었습니다. 안드레이의 사업가적 머리가 빨리 돌았고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이죠:
안드레이는 모스크바에서 120km 떨어진 환경이 좋고 숲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2000 평방미터의 밭이 딸린 시골집을 구매했습니다. 이 집을 그 노인 명의로 등록을 해서 그 서류와 함께 계약서를 노인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 계약에 의하면 그는 매월 300불씩 노인에게 지급하고 노인은 대신 텃밭에서 재배한 농산물 모두를 노인이 먹을 것만 빼고 자기 가족에 공급토록 했습니다. 노인의 이름은 나제즈다 이바노브나, 그 해 나이 62세였습니다. 노인은 서류를 잘 알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 안드레이는 노인을 마을 이장한테 데려가서 이장이 그녀에게 서류를 읽어주고 합법성을 설명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이장은 서류를 읽고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이바노브나, 당신이 잃을 건 하나도 없어요. 다 허물어진 집을 달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다시 되돌아 오세요”. 나제즈다 이바노브나는 마침내 동의했습니다.
그 할머니는 벌써 3년째 튼튼한 집에 삽니다. 안드레이가 일꾼을 얻어서 우물을 뚫고, 온방을 위해 보일러도 설치하고, 지하 저장창고고 파서 잘 다듬었습니다. 살림을 모두 울타리를 쳐서 막고 필요한 농기구를 모두 갖추고 염소, 닭, 사료를 사놓았습니다. 그 외 살림에 필요한 모두를 구비했습니다.
나제즈다 이바노브나에겐 그녀의 딸이 어린 손녀를 데리고 살러왔습니다. 안드레이는 아나스타시야가 말한 채소 재배에 대해 읽고 묘목을 손수 기릅니다. 씨앗은 반드시 나제즈다 이바노브나에게서 얻습니다. 과거 레스토랑의 지배인이었던 안드레이의 아버지가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여 여름에 모종을 나르고 할머니의 일을 기꺼이 돕습니다. 나제즈다 이바노브나는 딸과 함께 주거와 일까지 얻은 것이죠. 안드레이 가족은( 그와 처, 아버지, 그리고 두 아이) 여름 내내 친환경적인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얻고, 겨울에는 맛깔스런 소금 절임을 먹을 수 있습니다. 원한다면 연중 내내 약초를 얻을 수도 있지요.
제가 든 실례를 예외적인 사례로 일축해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10 여 년 전에도, 당시 제가 시베리아 지역기업인연합회장 직을 맡고 있을 때에도, 그 회원으로 가입한 여러 기업인들이 위의 예와 비슷한 방법으로 텃밭을 갖고자 했습니다. 자기 회사 혹은 자기 가족을 위해 그리 했습니다. 신문광고에 보면 이런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광고를 볼 수 있습니다. 단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나제즈다 이바노브나처럼 일할 줄 아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찾기 어려운 고로, 흙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해봅시다. 자기 땅에서 가난한 자가 아닌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경험을 서로 나누어 봅시다.
<질문> 블라지미르 니콜라예비치(형식을 갖추어 정식으로 메그레를 부르는 호칭:역주). 저도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시골 사람들로부터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최상품의 농산물을 생산하고 보관할 수 있어야겠지요. 대규모 농장에서 생산한 것들보다 맛이 뛰어나야 하고요. 그런데 이것도 대량생산이 된다면 수요가 줄어들 것이고 따라서 이들 농산물이 수요처를 못 찾게 된다면, 1ha에서 나오는 수입을 전부로 알고 사는 가족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답> 흙에서 나는 것은 토마토와 오이가 전부가 아닙니다. 다른 여러 가지도 자라겠지요. 하지만 러시아 가족의 절반이 자기 가원(家園)을 갖는다 해도 향후 이삼십 년은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러시아 사람들도 찾겠지만 외국의, 특히 부유한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높을 테니까요. 대부분의 나라에서 농산물 생산자들은 종자개량, 씨앗의 화학처리에 너무 빠진 나머지 시초의 모습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겉모습이 아닌 온 내용물이 말이지요. 오이와 토마토를 예로 든다면 여러분 모두 아래와 같은 사실을 스스로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대형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세요. 이런 상점이 도시에선 이젠 흔합니다. 진열대에서 아주 보기 좋은 수입 토마토, 오이(러시아에서는 네델란드, 스페인, 터키 등지에서 수입된 야채,채소가 대부분을 이룬다: 역주)를 만날 수 있습니다. 가격은 kg당 30루블 선입니다. 하나같이 크기도 같고 보기도 좋죠. 심지어는 초록 가지에 붙은 것도 팝니다. 그렇지만 향 냄새가 없어요. 돌연변이인 것이죠! 겉모습뿐인 허상이고 모형일 뿐입니다. 이런 변종을 세상 사람 대부분이 먹고 삽니다. 제가 발명한 사실이 아닙니다. 서구 여러 나라, 우리가 선진국이라 부르는 나라에서 사람들이 이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예로, 독일에선 이런 조치가 있습니다. 상품에는 재배 시 투입된 약제의 이름을 명기해야 합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이런 것을 사지 않으려 합니다. 유기농으로 좋은 환경에서 재배된 농산물은 가격이 훨씬 높습니다. 기존 서구 국가의 농사 시스템은, 완전하며 환경적으로 청정한 농산물을 생산하지 못합니다. 서구의 농부는 외국이 노동자, 온갖 기계류, 화학농약, 제초제를 사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농부는 더 많은 소득을 올리려고 합니다. 상상해 보세요. 서구의 한 농부가 청정 농산물을 생산하려 합니다. 게다가 아나스타시야의 권고 사항을 지켜서 말이지요. 기억하시겠지만 아나스타시야는 말했습니다. 잡초를 전부 다 제거하면 안 된다고요. 그들에게도 수확을 거두는데 행해야 할 자기만의 소명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농부가 자기 가족이나 친지를 위하여 그런 농산물을 재배한다 가정합시다. 그는 풀기 어려운 과제를 풀어야 합니다. 씨앗입니다. 종자개량의 결과 서구에는 태초 모습의 씨앗이 남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에도 극히 적습니다. 수입종자 판매를 허가한 이후 특히 더 그러합니다. 자기 텃밭에서 나는 씨앗을 이용하면 작물은 자기 태초의 모습을 찾으려고 합니다. 사람에 필요한 모두를 흙으로부터 담으려 하지요. 그렇지만 완전히 복원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립니다. 러시아에서는 역설적이지만 가난과 여러 텃밭 딸린 집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종자를 이용합니다. 바로 이게 이들의 강점이고, 곧 물질적인 면에서 일백 배로 보상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자 얘기를 합니다. 청정지역에서 농작물을 재배해야 하고 화학비료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 맞아요.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그리 말합니다. 하지만 말뿐입니다. 맛있고 몸에 좋은 농산물은 부족합니다.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가공도 있습니다. 통조림 공정도 있습니다. 科技 세상이 아무리 노력해도 첨단 기기를 갖춘 현대식 공장에서는 우리 할머니들이 만드는 토마토, 오이, 양배추 절임의 맛을 능가하는 제품을 만들지 못합니다. 어디에 비밀이 있을까요? 비법이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절임을 하기까지 오이나 토마토를 딴 지 15분이 지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시간이 짧을수록 좋지요. 그러면 감미로운 향과 오로라가 보존됩니다. 절임에 넣는 향초, 예를 들면, 회향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의 역할은 엄청나지요. 염소(鹽素)처리된 죽은 물을 이용한다면 무슨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물을 끓여서 통조림 병을 수증기로 처리 합니다. 하지만 샘물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절임에 월귤나무 열매를 넣기도 하지요… 한 번 해보세요. 샘물을 길어서 거기에다 1/3 분량의 월귤나무를 넣어 두세요. 이 물은 반 년이 지나도 아주 맛이 좋습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 재주 좋은 사람들이 직접 손으로 담그는 야채나 과일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회사들의 제품보다 맛에서 월등함을 직접 비교해보시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세요:
가원에 사는 한 가족이 1리터짜리 병에 천 개의 토마토, 오이 절임을 만듭니다. 여러 기준에서 다른 제품보다 월등한 상품이 생산되었습니다. 맛과 청정도에서 세상에는 따라올 상품이 없습니다. 이 농산물은 미국의 백만장자, 사이프러스 휴양지에서 휴양하는 여행객들, 기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자기 식탁에 올리고 싶어합니다. 병에 붙은 상표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이바노프 가원>>, <<페트로프 가원>>, <<시도로프 가원>>, <<韓氏 家園>>.
물론, 1리터짜리 절임 천 개를 판매하는 건 사업가에게 흥미를 유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을에 300 개의 가원이 있다면 이들이 생산해내는 양은 30만 병이 될 것이고 이건 대형 회사에서도 군침이 도는 규모입니다. 한 병의 시초 가격이 지금 슈퍼마켓의 가격과 비슷한 수준이겠지만 한 번 맛을 들이고 나면 가격은 열 배도 오를 것입니다.
오이와 토마토는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가원에서 생산되는 것은 여러 가지 입니다: 와인, 구즈베리나 나무딸기, 복분자, 마가목 열매 등의 과실액 또는 과실술. 그리고 그 외 여러 가지. 그 종류의 묶음(부케)은 각자 스스로 완성도를 높여가며 구성해보세요. 최고급 비싼 술도 이것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우리나라에서 얻을 수 있는 원재료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고전적 양조법에 따라 약초를 넣어 약효가 있고 비타민을 함유하는 술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나스타시야는 손으로 떠서 만든 러시아식 의복이 큰 인기를 끌 것이라 말합니다. 이 방향에서도 생각해 볼 것이 있지요. 겨울에는 손으로 깎아 만든 목기를 생산할 수도 있겠지요. 어쨌거나, 이런 민속의 지혜가 있습니다: <<행복하고 싶거든, 행복하여라>>. 마찬가지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풍요를 원하거든, 그리 되어라>>. 중요한 것은, 자신을 궁색하게 프로그램 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富)를 목표로 해야지요. 어떻게 하면 풍요로울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 그렇게 될 수 없다고 자신을 세뇌하지 않는 것, 이게 훨씬 더 합리적인 생각이지요.
질문: 아나스타시아의 주장에 의하면, 보통의 아파트에서보다 선생이 묘사하는 그런 가원의 여건에서 신혼부부가 사랑을 보전하기가 훨씬 수월하다고 합니다. 가족 문제를 다루는 심리학자나 의사들과 이 문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있는지요? 있다면, 그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뭐라 하던가요? 무엇으로 그 게 가능하다던가요?
답변: 학자들과 이 문제로 대화를 나눠보진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사랑이 보전되는가 보다는 그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선생 스스로도 자문해보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생의 아드님 혹은 따님이 어디에 살길 원하시는지요? 돌무덤 같은 아파트입니까? 아니면 훌륭한 동산에 에워싸인 집입니까?
딸, 아들, 자손들에게 무얼 먹이고 싶습니까? 통조림 된 식품인가요? 아니면, 신선하고 청정한 식품입니까? 결국, 우리는 건강한 자손을 바랍니까, 아니면 약을 달고 사는 자식인가요? 젊은 여성에게 물어보세요. 두 남자가 똑같이 마음에 드는데, 한 남자는 조립식 아파트에 가족의 둥지를 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훌륭한 동산에 있는 집에 그리 할 사람입니다. 어떤 남자와 결혼하겠습니까? 대부분이 후자를 택할 것입니다.
지적사항: 나라의 부흥은 정신적(영적)성숙에서 출발합니다. 이점을 이해하고, 우리나라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요인들이 도덕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나스타시아가 창조자 하느님의 법에 맞게 사는 지고한 도덕적 인물로 평가합니다. 아나스타시아는 도덕적 가치에 대해 얘기합니다만, 선생은 사람들을 거기에서 멀게 합니다. 게다가 자기 소유의 땅에서 사업을 하도록 하소합니다. 그건 사람들이 도덕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답변: 그 누구도 진정한 가치로부터 인류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현대 위정자들이 도덕을 얘기하는 건 좋은 일이지요. 아나스타시아의 언설이 처음부터 다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나중엔 결국 구체화됩니다. 제겐 철학적인 사변(思辨)보다 구체적인 것이 이해하기도 쉽습니다. 저는 구체적인 일이 정신적 차원에서도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얘기하는 것입니다. 도덕이나 하느님에 대한 세상의 이해는 다양합니다. 아나스타시아와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지난 일을 잘 생각해보고 나니 제게도 그 개념이 생겼습니다. 제게 하느님은 인격체입니다. 선하고 지혜롭고 쾌활한 인격체입니다. 자기의 자식 누구나가 다 행복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인격체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아버지입니다. 사람 모두에게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부여했습니다. 하느님은 자기의 자식을 위해 매 순간 행복이 넘치도록 노력하는 인격체입니다. 매일 그의 해님이 떠오르고 풀과 꽃이 자랍니다. 나무가 자라고, 구름이 유영(游泳)하고, 시냇물이 졸졸거리며 언제든 모두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 얘기만을 쉬지 않고 해댄다면, 지혜로운 우리의 아버지는 그것을 고양된 영혼이라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철의 장막”이 걷히고, 신앙심이 깊다는 온갖 부류의 전도자들이 우리나라로 몰려들었습니다. 러시아 집에서 양성된 사람도 적지 않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느님께서 우리한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줍니다. 식사를 좀 특별히 해야 한다는 이도 있고, 하느님에게 어떤 말로 호소하는 것이 좋은지 가르치려는 이들도 있고, 크리쉬나 신봉자들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종강종 뛰면서 주문(mantra)을 외쳐야 한다는 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말도 안 된다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이상한 몸동작이며, 강종강종 뛰는 것이며, 울부짖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고문은 하느님께 없다고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라면 누구나 자기의 아들 딸들이 아버지의 일을 지속하고 그와 함께 짓기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이 직접 지으신 조물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조물들을 소중이 대하는 태도, 신성한 조물들의 도움을 받아 자기의 삶과 자식들의 삶을 잘 가꾸는 일. 그보다 더 숭고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 표현이 무엇 있겠습니까? 어느 한 나라도, 어느 한 개인도 이상한 몸동작이나 명상으로 더 행복해지지 않았습니다. 더 행복해지지 않은 것은, 바로 그것들이 우리를 진리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매번 끊임없이 새로운 몸동작을 진리인 것처럼 던져주며 멀게 합니다. 가르침은 생겼다가 사라집니다. 어떤 것은 수백 년간 존속하기도 하지만 나중에 보면 조소(嘲笑)만 일게 할 뿐입니다. 어떤 것은 섬광처럼 나타나서 몇 년을 존속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들이 가고 나면 남는 것은 깨진 운명과 버려진 쓰레기 오염뿐입니다.
“우리는 왜 항상 온갖 부류의 종교인들로부터 하느님에 대해 서로 상이한 말을 들어야 하지? 왜 하느님은 우리에게 직접 말씀을 한 하시지?”라는 질문에 아나스타시아는 답했습니다.
“말이라고? 지상의 여러 민족들한테는 다양한 의미를 담은 말이 너무도 많아. 서로 닮지 않은 말, 방언이 참 많기도 하지. 그런데 우리 모두를 위한 신성한 언어가 하나 있어. 그것은 나뭇잎의 사락사락 소리와, 새들의 노래와, 파도의 운율로 직조(織造)되었어. 하느님의 언어는 향기롭고 색이 아름다워. 하느님은 이 언어로 모두의 요청(要請)과 기도에 답을 주셔”
제 말은 물론이거니와 아나스타시아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봄의 숲이나 정원에 나가보세요. 잠시 침묵하고 가슴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아나스타시아는 말합니다. <<지구에서 파괴 에너지가 모두를 누르고 최고 자리를 차지할 때, 사람들이 하느님을 자기 편의대로 해석하면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려는 마음이 들 때, 하느님은 무엇을 할 수 있지? >>란 질문에 대해 << 다음날 새벽 노을로 높게 솟을 거야. 모든 조물을 하나도 예외 없이, 햇빛이 지구를 애무하며, 나의 딸과 아들이 누구나 마음으로 내 마음과 얘기할 수 있음을 깨닫도록 할 거야. >>라고 답했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믿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막힌 길, 끊긴 길로 이끌려는 시도는 다 주요 장애물에 가로막힐 거야. 그건, 거짓을 품은 모든 것에 장벽이 될 거야. 내 아들과 딸들은 진리 탐구의 열정이 있어. 거짓은 항상 틀을 갖지만, 진리는 경계가 없어. 진리 혼자서, 나의 딸과 아들의 깨어있는 마음에 항상 같이 할 거야!>>
그러니 게으름 피우지 마시고, 딸랑거리는 방울에 맞추어 강종강종 뛰는 바이오 로봇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식이라는 깨달음을 가슴에서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세요, 베풀어주세요, 자유롭게 해주세요… 얼마나 더 하느님께 달라고 하겠습니까?....
아버지가 즐거워할 뭔가를 우리가 좀 해야 할 때가 아닌가요? 무엇이 아버지를 기쁘고 즐겁게 할 수 있을까요? 아나스타시아는 이와 비슷한 질문에 답하면서, 수많은 종교와 종파를 검증할 수 있는 간단한 테스트를 하나 소개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오는 주장이 당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면, 그 전도자 스스로는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아. 그 다음, 모두가 그렇게 산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아>>
이 간단한 테스트로 많은 것을 검증할 수 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크리쉬나 추종자들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문을 외치면 인류가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았습니다. 바로 세상의 종말이 보입니다. 자 이젠 상상해보세요. 지구 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동산을 가꾼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연히 온 지구가 꽃 피는 동산으로 변할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사업을 해서 그런지, 구체적인 게 제겐 더 가깝습니다. 도덕적인(영적인) 사람이란 지구와, 자기 가족과, 자기 부모와, 결국은 하느님께 이로운 행위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도덕적(영적)이라 여기는 사람이 자신을,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과 자기 가족과 자식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가짜 도덕입니다.
질문: 아나스타시아는 질적으로 다른 아동 보육과 새 학교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건 아나스타시아가 묘사한 마을에서만 가능한가요? 아니면 현대 도시에서도 가능할까요? 이에 대해 쉐찌닌은 어떤 의견인가요? 1권에 보면, 아나스타시아는 어린이 보육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항상 그에 대해 얘기하려 합니다. 선생은 이 문제를 책에 거의 다루지 않고 항상 피해갑니다. 왜지요?
답변: 미하일 페트로비치 쉐찌닌은 숲에다 기숙학교를 세웠습니다. 가원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처음 세워지자마자, 거기에 미래의 새 학교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짜달라고 그에게 부탁하겠습니다. 그가 그 학교에서 직접 가르칠 수 없다면 최우수 학생이라도 보내달라고, 지금 일하고 있는 교사들 중 적절한 사람을 선발해달라고 요청하겠습니다.
그런 학교를 현대의 도시에 세우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 학창시절을 생각해봅시다. 학교에서 하는 말 다르고, 길거리에서 하는 말 다르고, 집에 가면 또 말이 다릅니다.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세상의 온전한 이치를 구하다 보면 인생이 반은 지나갑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에 앞서 스스로 잘 사는 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되면, 학교와 함께 보조를 맞추어 서로 서로를 보충하며 아이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아나스타시아는 정말로 어린이 보육에 대해 자주 얘기합니다. 그녀가 하는 말은, 날짜 시간 분 단위로 짠 시스템하고는 딴판입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종종 잘 이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이 보육은 부모 자신이 자신을 보육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으로부터, 하느님의 생각을 접해보려는 시도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보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가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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