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마당

러시아 여행소감1

haanbs 2010. 1. 1. 20:55

 

 

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이상 콘텐츠를 노출 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보기

 

금년 초엔가 모스크바에서 온 친구가 한 말이 잊혀질만 할 즈음,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브즈즈즈...하고 떨었다. 역시 그 친구였다.


-한씨! 12월 21-22일 모스크바대학에서 한-러 문학 번역인 컨퍼런스가 있습니다. 올 수 있습니까?
- 아, 네 갈 수 있지요.
쉽게 쉽게 대답을 하진 했지만 은근히 걱정이 부풀어올랐다. 올 초 모스크바에서 온  친구는 이렇게 나를 설득했다.
-모스크바대학 한국학센터에서 번역인 모임을 가질 예정인데, 교수란 사람들은 모이면 고리타문한 말씀들만 한단 말이지. 한씨는 이렇게 시골에 살고 또 아나스타시아 책 시리즈를 번역하고 있으니 뭔가 할 얘기가 있을 것 같아요. 확실치는 않지만 연말에 모임을 가질 수 있을 듯 한데 오시겠습니까?

 

내가 머뭇머뭇하자 그 친구는 이렇게 나를 흔들어 놓았다.


- 돈은 못드리지만 항공료하고 먹고자는 것은 모스크바대학이 부담하겠습니다.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간지 오래되어 내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지금 이렇게 연락이 온 것이다. 날짜가 확정되었고 항공권예약을 위해 여권 사본을 보내달라고 한다. 비자를 받기 위한 초청장도 곧 발송하겠다고 한다.


-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난 그 모스크바 친구에게 시원시원한 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로 일이 잘 잡히지 않았다. 앞으로 20여일 남아있는데 무슨 준비를 해야할까. 그냥 와서 뭔가 재미있는 얘기를 해라는데... 허 참 무슨 얘기를 해야한다? 올 겨울 땔 장작을 패도 그 생각은 나를 떠나지 않았고, 스케이트장을 한다고 우리 집 앞 논에 물을 대는 때에도 내 머리속을 깨끗이 정리된 상태로 내버려 두지를 않았다. 난 이렇게 모스크바 문학 번역인 컨퍼런스에서 발표할 주제를 정하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평소에 하던 생각을 정리해 발표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우리말과 러시아말은 어쩌면 이렇게 정반대일까? 우리말에서는 "문열쇠"라고 하는데 러시아말에서는 먼저 열쇠가 나오고 문이 더해지는 식이다. 독자를 위해 번역을 하자면 "문열쇠"가 되지만 내가 느끼는 감은 여전히
"열쇠+문"인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은 실은 한 참 전이다. 어쩌면 우리말과 서양 사람들의 말은 이처럼 반대일까? 내가 왼손을 들면 거울 속의 나는 오른손을 든다. 이때 재빨리 손을 바꿔 오른손을 들면 거울속의 녀석은 만큼 빨리 왼손을 든다. 우리 말과 러시아 말을  포함한 인도유럽어족은 정확히 이런 관계에 있다. 그래서 난 이런 평소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열쇠(열쇠+문)"
"감기약(약+감기)"
"넓이뛰기(뛰기+길이로)"
"높이뛰기(뛰기+높이로"
"우리 말에서는 사과가 있으면 사과란 것에서 껍질을 벗겨내지만, 러시아적 표현은 사과란 것에서 껍질을 제외하고 속알을 파낸다. 러시아 사람은 이렇게 사과껍집을 벗긴다. 아니 아니... 파낸다."

 

정리를 하다보니 이런 현상을 한 마디 정의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아 하, 생각의 흐름이 다른 거구나. 장기에서 "차"란 놈은 전후좌우로 쭉쭉 나아갈 수 있고, "포"는 누구를 뛰어 넘어야 갈 수 있듯이 한국말에서는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가상의 어떤 틀에서 혹은 넓은 공간에서 점으로 축소하는 반면, 러시아에서는 반대로 화자의 생각이 하나의 점에서 넓은 공간으로 확산하는 구나!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수없는 예들이 떠올랐다.


-우리와 서양의 주소쓰기방법
-성과 이름
-시간 말하기
-하다 못해 우리 톱은 내쪽으로 잡아당길 때 나무를 쓰는 반면, 서양톱은 밀어낼 때 나무가 잘린다는 얘기도 생각났다.

 

이제 내 생각은 상상의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아, 이러니까 그렇구나. 모든 게 이 틀에서 설명이 되는 듯 했다. 우리말에서는 생각의 흐름이 큰 것에서 작은 것, 전체 공간에서 하나의 점으로 모이다 보니, 한 점을 자세히 묘사할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이구나. 그래서 러시아말에서는 한 점을 자세히 묘사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단수니 복수니 남성이나 여성이니 무슨 격이니하는 것들이 분명이 표현되지만 우리말에서는 성은 완전이 무시되고 수란 것도 엄청 제한적으로 사용되는구나...식으로 생각이 정리되었다.

이제 내 생각의 날개에는 로켓트 추진 엔진이 달렸다. 그래서 우리의 의학에서는 몸을 하나의 유기적 통째로 보는 반면, 서양의학은 부분 부분을 하나의 별개인 기계로 보았구나. 우리 동네 한약방에 가면 아무리 돌파리 의사라도 내가 아픈 데는 허리인데 정착 침을 놓은 데는 허리가 아니고 손과 발 등이 아니던가.
그럼 그림은 어떤가. 서양화는 디테일이 확장하여 화폭에 빈 곳이라곤 찾아볼 수없이 꽉 찬 반면, 우리 그림은 네모난 화폭에서 안으로 줄어들어 정작 그림 속의 주인공은, 김홍도의 그림에서 보면, 눈과 코도 잘 구분이 안될 정도로 대충 그렸고,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던가?
음악은 어떻고? 재즈, 메탈릭 하드록, 오케스트라, 랩... 가야금, 대금, 제례음악...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자연과학을 볼까? 서양에서는 진리탐구를 위해 원자를 조깨 양성자, 중성자, 분자를 보았지만, 우주전체를 하나의 전체로 보는 우리의 사고의 틀에서는 오직 관계만이 현실이었다. 보라! 도자, 노자, 공자, 우리나라의 이기론 논쟁을. 헬리콥터를 그 오래 전에 디자인한 미켈란젤로, 그는 철학 수학 의학에 능통했다면 이황, 이이 선생이 그런데 심오한 관심을 가졌었다고 난 알지 못한다.

 

생각의 흐름이란 한 점에서 시작된 내 생각은 동서양 문명 비교론으로 부풀어있었다. 이젠 자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내 발표를 듣고 사람들이 흥미진진해 할 것이라고...
그러던 어느 날 모스크바대학에서 컨퍼런스 참석자들의 명단과 프로그램이 내 이메일로 날아들었다. 파일을 연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주제발표자 명단:
니꼴라이: 톨스토이 연구의 세계적 대가. 일본정부의 부담으로 일본대학에서 수 년 강의한 경력
김아무개: 외대교수, 내 학창시절 읽던 "러시아 역사"의 역자
콘체비치: 모스크바 동방연구소, 훈민정흠해례본을 세계최초로 완역하신 분
가르보프스키: 모스크바대학 언어학부, 문학번역이론의 대가...

 

한 마디로 주눅이 들게 하는 화려한 명단이다. 난, 학교 졸업하고 대학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농사를 짓는 촌놈이다. 달력의 날짜는 하루하루 뒤로 물러나고 드디어 12월20일이 다가왔다.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발을 옮기는 내 심정은 밝지만은 않았다. "모스크바 쉐르메쩨보 공항의 외기온도는 영하 15도 입니다" 하는 아에로플로트 기장의 안내 멘트는 관심 밖에 있었다. 눈 내리고 바람불고 어두침침한데다가 영하 15도의 날씨였지만 내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컨퍼런스 개회사가 있었다. 내 주제 발표는 22일 날, 마지막 날. 그것도 맨 끝에 조정해 놓았다.
모스크바 그 친구가 하는 말:

- 한씨를 맨 마지막 발표자로 배열한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말, 러시아말 사용자들의 상이한 세계관"이란 주제가 이번 컨퍼런스를 잘 마감하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 허걱... 점점점.

 

모스크바주재 한국대사님의 환영사가 있었고... 드디어 내가 연단에 올랐다. 난 속으로 계속해서 이렇게 한 마디 말만으로 자신을 조율하고 있었다.
"내 속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자. 밖을 보지 말고 내 안을 보자"

연단에 오른 나는 나도 놀랄 정도로 침착했고 여유도 만만했다. 잠시 자기소개를 하고 본 주제발표에 들어간지 채 1분도 안 되어 청중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이 느껴졌다. 내 말에 수긍한다는 고개의 끄덕임과,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떠밀려왔고, 그것은 나를 더욱더 진정시키고 힘을 부어주었다. 그렇게 잘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왔다. 휴우우... 한 달 묵은 체증이 뚫린 듯했다. 농사짓고 가원이나 한다는 놈이 하는 일이나
잘 할 것이지 전문가들 틈에 끼인다고 참 마음고생 많이 했다. 다음부터는 이런 고생 사서하지 말아야지...

 

PS: 우리의 고전문학, 훈민정음, 삼국유사, 시조, 향가 등등을 원문 텍스트를 가지고 직접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러시아 학자들. 나는 도저히 한 문장도 알 수 없는 텍스트를 러시아어로 풀어내며 체제적으로 학문을 하는 이들의 전문성과 열정에 난 존경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감사한다.

'독자 마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 다짐  (0) 2010.01.04
러시아 여행소감2  (0) 2010.01.01
연말연시  (0) 2009.12.11
비타민나무, 산사나무, 해당화  (0) 2009.05.13
봄소식  (0) 2009.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