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원이라는 훌륭한 환경에서 잉태하고, 임신 전(全) 기간을 보내고 출산을 할 때의 탁월함을 생리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나스타시아는 그 이상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하면 태어난 사람이 우주와 완전한 관계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 무엇으로? 출산에 대한 이런 식의 준비가 앞으로 태어날 사람의 운명에 얼마나 중요할까요? 현대 과학자들은 가정을 세울 수 있을 뿐입니다.
저는 아나스타시아의 말을 요새 인기 있는 운세와 비교해보았습니다. 생각, 생리적 잉태, 아니면 엄마의 뱃속에서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등의 세 요소 중에서 사람의 탄생에 가장 주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출생일은 대개 갓난아이가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을 기준으로 운세를 봅니다. 그런데 태아는 이미 엄마의 뱃속에서 살고 있고 느낄 수 있다고 우리 과학은 알고 있는 것이죠. 아이는 움직입니다. 엄마는 아이의 손발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어요. 사람의 출생의 시점을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이라 해야 더 정확할까요? 생리적 입장에서 볼 때, 이 때가 좀 더 정확한 출생의 순간입니다. 그렇지만… 정자와 난자의 만남은 원인이 아닌 결과인 것입니다. 그보다 앞서 두 사람의 생각이 있었지요. 출생일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생일은 세 가지 요소 중 태아가 세상에 나타나는 순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죠. 그렇지만 내일은 상황이 다를 수 있는 것이죠. 아나스타시아의 이론에 따르면, 사람의 출생일은 상기한 세 가지 구성요소가 모두 하나로 합일되는 때입니다. 여기에는 반박이 불가능한 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대과학 그리고 종교는 이에 대한 언급조차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 뭐가 두렵다는 거죠.
- 그런 게 있어요, 블라지미르 니콜라예비치, 우리가 아나스타시아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하면, 그녀가 일원으로 있는 문화의 사람들에 비해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못 된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온전한 사람한테 내재하는 셋 중 하나나 둘이 부족한 것이죠. 바로 이 때문에 언급은 고사하고 생각조차 하기 두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 이론의 여지가 많아서 그런 것 아닐까요?
-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첫째, 정자와 난자가 만나기 전에 방탕이 아니라 태어날 아이에 대한 생각이 앞선다면 훨씬 도덕적이고 심리적으로 더 충만하다는 사실을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 임신한 여인이 온전한 식사를 하고 스트레스를 피해야 함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아나스타시아가 얘기하는 가원이 이런 조건을 충족하기에 최적인 것이죠.
셋째, 산모에게는 자신이 익숙한 장소와 환경에서 출산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갓난아기한테는 더욱 그러하겠죠. 이점도 심리학자나 생리학자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선생은 이 점에 동의합니까?
- 물론 동의합니다.
- 거 보세요. 논란의 여지가 없지요. 학자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 가지의 긍정적인 요소가 하나로 합쳐질 때 일어나는 긍정적인 효과를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결합이 이루어질 때, 공간(공중)에서는 심리적 반응이 일어난다고 저는 심리학자로서 가정할 수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공간이 응답합니다. 그것은 갓 태어난 아기를 받아들이고 그와 정보적 소통을 하게 됩니다.
-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여기서 사람의 정확한 출생일 규명이 무슨 소용이 있는 거죠?
-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우주적 차원에서요. 그것으로 우리 자신의 세상에 대한 느낌이 정해집니다. 태아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 중시된다면, 우리의 인식체계에서 물질이 우선시 되는 것이죠.
남성과 여성의 생각의 합일을 최우선시 한다면, 우리의 인식체계에서 우선은 의식이 되는 겁니다. 그 결과 다른 문화와 다른 삶의 방식이 지어지는 것이죠. 전자의 경우에는 물질이 선호되고, 두 번째 경우는 영적인 것이 우선입니다. 이에 대한 논쟁은 이미 오래된 것입니다. 하지만 제겐 이에 대한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나스타시아는 이 두 가지 개념에 더하여 제 3의 것의 합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녀의 주장에 근거하여 온전한 사람의 출산에 대한 이론을 세울 수 있고, 그의 현실적 가능성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단순할 뿐만 아니라 누구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할 수 있는 걸 실천하지 않을까요? 왜 우리의 의식은 혼돈 상태에 있을까요? 우리의 삶은 부산한데, 그게 문제입니다.
- 아기가 엄마의 뱃속에서 세상에 나오는 날짜와 시간을 생일로 삼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표현을 좀더 정확히 할 필요는 있겠죠. 세상에 나온 시간이라고.
- 그럴 수도 있죠. 그럼요! 하여튼 아나스타시아한테 출생의 순간에 대해 여쭈어봐 주세요.
- 물어보지요. 내가 언제 태어난 것인지, 내 아들은 언제 태어났는지 나 자신도 궁금합니다.
- 선생의 아드님이요… 선생은 제게 자문을 구하려 오셨는데 저는 제 얘기만 풀어놨습니다… 죄송합니다. 말이 길었습니다. 문제가 많아서리… 제가 일주일에 세 번 환자를 봅니다. 온갖 문제를 가지고 옵니다. 하지만 질문은 항상 한가지예요. 아이를 어떻게 키우냐 하는 거죠. 아들 또는 딸과 어떻게 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냐고 묻습니다. 아이는 나이가 다섯, 열, 열다섯인 경우도 있지요.
<< 아바이, 아이를 다시 교육시키기엔 늦었어요. >> 이렇게 제가 말한다면 마지막 희망을 끄는 격이죠. 그래서 결국 저는 위안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 그럼 제 아이도 곧 다섯 살이 되는데 저도 늦은 건가요?
- 블라지미르 니콜라예비치, 선생의 경우는 좀 다르죠. 선생의 아들 곁에는 아나스타시아가 있어요. 그녀가 아이를 우리 세상에 던져 놓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그녀는 아이를 다른 문화에 맞게 키우고 있습니다.
- 그러니까, 나와 아들은 서로 다른 문화의 사람이고, 결국 서로 절대 이해할 수 없단 말씀이신가요?
- 부모와 아이는 항상 다른 문화, 다른 세계관을 갖게 마련입니다. 세대마다 우선시 하는 게 다르지요. 사실 그 차이란 게 선생의 경우처럼 확연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제가 선생께 드리는 권고입니다. 아들과 만나 어울리기 전에 어떻게 하면 좋은지 아나스타시아와 상의하세요. 그녀가 하는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세요. 선생은 육아에 대해 많은 책을 읽었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그녀를 이해하기가 좀 날 거에요.
- 항상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그래요. 어떤 말은 좀 의심스럽고요. 신비롭고 증명하기가 불가능하죠. 아나스타시아가 한 말 중 여러 가지를 난 책으로 써낼 생각이 없어요. 그랬다가는 판타지 소설 비슷하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이때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는 갑자기 책상을 쾅 두드리더니 날카롭고 좀 거칠게 내 말을 막았다:
- 선생이 그리 할 권리가 없어요! 선생의 지혜가 모자라서 이해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한테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그의 날카로운 말투와 의도에 기분이 좋질 않았다. 이런 말을 듣거나 읽은 적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런 말의 논리에 따르자면, 나는 덜 떨어진 사람이고 내가 기껏 할 수 있는 역할이란 고작 타이가 외톨이의 말 모두를 가능한 한 정확히 옮겨 적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똑똑이들이 놓지는 것이 있다. 난 갑자기 호전적으로 돌변한 심리학자한테 제자리를 찾아줄 요량이었다:
- 선생은 자기 자신을 아나스타시아의 얘기 모두를 다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구분하고 싶겠지요. 난 학위가 있는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그런 나조차 분명히 아는 게 있습니다: 증명이 안 되고 신비한 말 모두를 책으로 펴낸다면, 사람들이 책에 있는 것 모두를 옛날이야기 정도로 생각할 것이고, 그렇다면 오늘 당장 활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 것들조차 모두 생매장되고 맙니다. 신비로운 언급 일부를 책으로 써내지 않아서, 그럼으로써 합리적인 것을 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저 일지도 모릅니다.
- 무슨 신비로운 게 있다는 건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보시겠습니까?
- 이런 얘기도 있죠. 아나스타시아는 왈(曰), 우주에서 좋은 소리들의 조합을 모아서, 그걸 책의 텍스트에 숨겨놓았으며, 책을 읽는 사람한테 이롭게 작용한다고 합니다.
- 그래요. 저도 기억합니다. 잘 기억하죠. 제1권에 쓰여있죠. 거기에는 또 독자가 책을 읽을 때,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 그 효과가 더 커진다고 쓰여있습니다.
- 기억하는군요! 그 말이 책의 내용 중에는 물론이고 책 표지의 안쪽 면에도 적혀있습니다. 기억나나요?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 발행인들이 제게 그러자고 해서 제가 따른 거에요.
- 잘 하셨습니다.
- 잘 했다고요?! 그 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책에서 멀어진 건 모르시나 보죠? 많은 사람들이 그걸 허위 과장 광고라고 생각했고 언론매체에도 이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난 몇몇 출간본의 표지에서 그걸 빼버렸습니다. 그걸 신비다, 허위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 바보천치들입니다! 우리 사회의 지적 능력이 그렇게까지 퇴화할 수가 있나요? 지적인 게으름이 대중의 논리적 사고를 스위치 내려버리는 건 아닐까요?
- 여기서 지혜의 태만이 왜 나옵니까? 증명할 수 없다면…
- 증명이요? 뭐 증명할 게 있습니까? 그 말은 지적 능력이 완전히 퇴화된 멍청이를 일순간에 간단히 가려내는 심리 테스트에 다름 아닙니다. 그 단순함과 효과에서 가히 천재적이죠. 언론매체에 떠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여기를 보세요, 내가 얼마나 멍청한지” 하고 떠드는 것과 똑 같은 것이죠. 천재적인 테스트입니다!
- 테스트가 무슨 소용인데요? 그 말은 증명이 안 돼요.
- 증명이 안 된다 생각하세요? 증명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아나스타시아가 한 말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떤 책이든, 예, 어떤 글이든, 어떤 말이든 그 텍스트는 소리의 조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건 이해되죠? 동의하십니까?
- 그야 뭐, 네, 동의합니다. 정말 모든 책의 텍스트는 조합으로 돼있군요…
- 거 보세요. 간단하지요? 그 단순함에 논리적으로 생각하기를 태만히 하는 자들이 걸려 넘어진 겁니다.
- 그럴 수 있겠네요… 하지만 아나스타시아는 삼라만상의 공간에서 최상의 조합을 찾아 모아 놓았고, 그것이 독자들한테 이롭게 작용하는 거라 했거든요.
- 그 말도 하나 신비할 게 없어요. 스스로 판단해 보세요. 선생이 이런 저런 책을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다고 칩시다. 그것이 정말 선생한테 영향을 미치지 않나요? 텍스트를 읽고 난 후, 선생은 무관심할 수도 있지만 경멸이나 만족 혹은 노여움 또는 기쁨을 얻을 수도 있지요. 그런가요? 이해가 되나요? 동의합니까?
- 네.
- 거 잘 됐군요. 아나스타시아의 텍스트가 미치는 영향이 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독자들의 반응으로 이미 증명이 되었습니다. 서평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건 돈 주고 살 수도 있거든요. 이로운 영향에 대한 증거는 창작에 대한 열의입니다. 선생의 독자들이 쓴 수많은 시와 노래들이 그 증거입니다. 저도 아나스타시아한테 바치는 시와 노래 모음집 5권을 샀습니다. 그걸 쓴 사람은 보통 사람들입니다. 아니 보통 사람이 아닌지도 모르죠. 오디오 카세트를 사서 들어도 보았습니다. 아나스타시아의 말이 생활에서 스스로 드러난 것이지요. 책을 읽고 난 후 그 영향으로 시가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신비>>라고요? 선생이 아나스타시아를 검열할 자격은 없어요.
- 알겠소. 안녕히 계시오. 조언 감사합니다.
나는 심리학자의 캐비닛에서 나갈 참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 잠깐만 기다리세요, 블라지미르 니콜라예비치, 제게 화가 나셨군요. 제 말투가 격했다면 사과드리지요.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는 진료실 가운데 섰다. 약간 뚱뚱한 중년의 남자다. 그는 양복 단추를 얌전히 잠그고 말을 이었다:
- 선생은 아나스타시아가 하는 말 모두를 써내야 합니다. 아나스타시아가 한 말 중 선생한테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도 어쩔 수 없어요. 저나 다른 누가 이해할 수 없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해야 해요. 그들이 알아 듣는 게 중요합니다.
- 그들이 누구죠?
- 젊은 여성들이요.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들이 일단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게 반드시 변할 거에요… 헌데… 선생이 저를 찾아온 건 아드님 때문이었는데, 그에 대해선 별반 얘기를 나눈 게 없군요.
- 네, 그래서 왔습니다.
- 하지만 하나도 구체적인 조언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너무도 예외의 경우라서… 삽화가 담긴 책을 타이가 아들한테 가져가 보세요. 역사책도 괜찮을 듯 합니다. 옷을 좀 잘 입고요. 제가 하는 말이 멍청한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아이에게 잔혹한 우리의 현실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럽니다.
- 그럼 어떻게 합니까? 연지 곤지 바른 현실을 보여줄까요?
- 그런 게 아닙니다. 선생은 아들한테 우리의 현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아들 앞에서 체면이 깎일 수 있단 말이죠.
- 왜 내가 우리 사회의 변태들 모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까?
-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든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아들한테 보여주지 못하면 무기력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죠. 아드님 앞에서 체면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 아이는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게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게 성장했습니다.
- 선생 말씀이 맞는 듯 하군요,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우리 사회를 좀 포장해서 보여주는 편이 낫겠어요. 맞아요. 그래 해야겠어요. 안 그랬다간…
우리는 악수를 나누고 불쾌한 감정 없이 작별을 고했다. 내겐 그리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