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스타시아

1장 계속3

haanbs 2007. 12. 5. 20:05

- 다정함! 그걸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심리 상태는 항상 외부에 표출되게 마련이죠. 기쁨은 웃음, 미소입니다. 슬픔에는 그에 상응하는 눈의 표정, 자세, 기타 등등이 있지요.

 

순전히 성적인 애무와, 앞으로 날 아기를 만지듯 하는 남자의 여자에 대한 애무는 뚜렷한 차이가 있어서 구별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후자의 경우에만 <<그 무엇>>이 일어나고, 지구의 생명체 중 오직 사람만이 그걸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무엇>>은 과학적인 묘사 또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을 분석할 수 없습니다. 저는 심리학자로서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때에 주가 되는 것은 두 개의 생리적인 몸의 합체가 아니라 그와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무엇일 것입니다. 두 생각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지요. 더 정확하게는, 둘의 생각이 한 덩이로 합쳐지는 것입니다. 이때 얻어지는 만족, 체험된 지고한 복은 단순한 성적 만족을 훨씬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유지시간은 보통 섹스에서처럼 단명하지 않습니다. 알 수 없이 좋은 기분의 상태는 몇 달이고 아니 몇 년이고 지속됩니다. 이것으로 서로 사랑하는 튼튼한 가족이 형성됩니다. 아나스타시아는 바로 이점을 말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이것을 한 번 체험한 남자는 그때의 느낌을 단순한 성적 만족과 바꿀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아내 몰래 부정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바로 이 순간부터 가족,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혼인은 하늘에서 맺어진다. >>라는 표현이 있는데, 우리의 경우에 꼭 들어맞는 표현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오늘날 하늘에서 맺어진 혼인은 무엇으로 증명이 되나요? 주민등록소에서 발급해 주는 종이 쪽지, 교회에서 행해지는 온갖 의례뿐이지요. 우스운 거지요, 안 그렇습니까? 우스우면서도 슬프지요. 아나스타시아의 정의는 정확합니다: 하늘에서 맺어진 혼인의 증표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너무도 좋은 특별한 상태일 뿐입니다. 그 결과로 온전한 새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고요.

오늘날 대부분의 아이들이 혼외의 관계에서 태어난다는 점을 저는 첨언할 수 있겠습니다. 아 그리고 잠시만요 나의 동료인 성임상학자의 해설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나스타시아>> 책에 묘사된 남녀의 성적인 상호관계는 섹스의 새 지평을 여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인도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분야에 대해 쓰여진 모든 기존의 서적은 아나스타시아의 말의 의미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순진하고 가소로울 뿐이다. 오늘까지 전해지는 고대와 그리고 현대의 섹스에 대한 글은 온갖 자세와 애무의 기술 또는 그 밖의 외적인 요소를 탐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마다 생리적 심리적 재능과 가능성은 다 다른 것이다.

사람마다 다 다르게 자기의 성격, 기질에 맞는 가장 효과적이고 수용 가능한 한 가지 자세가 있기 마련이다. 그에 따르는 일정한 소품이 있는 것이다.

기존의 수많은 방법들 중에서 어느 한 사람한테 가장 적합한 것을 정확히 선별할 수 있는 전문가는 아마도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수천 개의 방법을 모두 속속들이 다 잘 알아야 하고, 그 사람의 생리적 심리적 상태도 잘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현대 사회에서 점점 더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발기능력을 상실한다는 사실이, 남녀의 성적인 관계에 대한 현대의 이론이 문제가 있음을 반증한다. 성적으로 파트너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부부가 늘고 있다. 하지만 이 서글픈 그림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아나스타시아가 보여준 것이 증거하는 것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던 문제를 한 순간에 해결할 능력이 있는 어떤 메커니즘이, 어떤 초월적인 힘이 자연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메커니즘이 혹은 어떤 힘이 남과 여 두 사람의 특정 정신 상태에 작용하여, 그 단 두 사람한테만 딱 들어 맞는 성적 상호관계의 상태와 방법을 특별히 찾아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는 만족이란 최고 중 최고일 것이라는 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만족을 체감한 남자와 여자는 어떤 법과 의례를 통해 부부의 연을 맺었든 그와는 상관없이 부부의 정조를 항상 간직하게 될 것이다.

 

부부간의 정조!   부부 사이의 부정. 간통.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는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선 채로 계속 말을 이었다.

 

- 아나스타시아가 이 현상의 본질을 처음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문장 일부와 긴 독백을 기억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그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육욕(肉慾)만으로 쉽게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사람한테 주입하지. 그렇게 해서 사람을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거야. 속임에 넘어간 불쌍한 여인들은 평생 내내 고통을 받고 잊어버린 복을 찾아 헤매. 근데 번지수가 틀렸어. 자기의 색욕만을 위해 남자에 스스로 몸을 바치는 여자는 그 누구도 남자의 방탕을 절대 막을 수 없어. >>[1] 이런 말도 있지요. 잠시만요 아 여기 << 그 후 새 몸뚱이만을 계속해서 찾거나 자기 몸을 지겹게 헛되이 줘버리지. 이때 진실한 결합의 진실한 복은 점점 더 멀어져 감을 단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고! >>

부부 간의 불신의 원인을 너무도 정확히 지적하고 있어요. 심리학자인 나는 이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주 논리적입니다: 소위 남편과 아내라는 남자와 여자가 섹스를 위한 섹스를 합니다. 둘은 만족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고, 보충 자료를 읽습니다. 자세를 다양하게 구사해보고 애무를 하라고 두 사람에게 권고합니다. 한마디로, 섹스의 테크닉을 이용하여 더 큰 만족을 구해보라는 것이지요.

주목하세요. 구해보라 합니다. 하지만 말로 하지 않아도 둘은, 아나스타시아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직감적으로 더 지고한 복이 있음을 느끼고 찾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찾는 일의 경계는 어디일까요? 자세를 바꾸는 것에 한정될까요? 몸을 바꿔보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인 것이죠.

<< 저런! 우리 사회는 외칩니다 - 그 건 간통이야! >> 하지만 간통이랄 게 없습니다. 부부가 없으니까요!

종이 쪽지로 조건 지어진 혼인이란 부부관계가 아닙니다. 그건 단지 사회가 고안해낸 조건일 뿐입니다.

혼인관계는 아나스타시아가 얘기한 최고의 상태를 남녀가 체감하는 것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아나스타시아는 그에 대해 얘기한 것은 물론, 어찌하면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지도 보여주었습니다. 이건 남녀관계의 새로운 문화인 것입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죠,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젊은이들한테 혼전 성관계를 하란 말씀이신가요?

- 대부분의 사람이 바로 그리 하고 있습니다. 터놓고 얘기하기를 수치스러워할 따름이지요. 하지만 제가 권하는 바는, 혼인관계를 등록하지 전에도 그 후에도 섹스를 위한 섹스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자유사회라고 하지요. 우리는 얼마고 음탕을 즐길 수 있습니다. 실제 그러고 있고요! 음탕은 산업입니다. 영화와 온갖 포르노 물, 매춘, 성인용품 가게에서 살 수 있는 고무 여자들이 그 증거입니다.

둘의 유대감을 맺어주는 메커니즘의 본질과 소명을 밝히는데 현대과학이 아무 맥을 못 추는 상황에서 환한 빛처럼 새 발견이 나타난 것이죠.

심리학자인 저는 아나스타시아의 발견이 위대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녀관계의 새 문화를 보여준 것입니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역할은 여성의 몫입니다. 아나스타시아는 선생도 이 문화를 알게 해주었지요. 고대의 어느 문명의 지식을 활용하여 직감적으로 그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동료가 실제 증명을 했습니다. 남자도 그럴 수 있다고 증명을 한 것이죠.

그는 성임상학자입니다. 우리는 아나스타시아의 말을 분석해보았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던 상호관계의 새 문화에 대해 그가 먼저 얘기했습니다. 그 사람이 가장 놀란 건 아나스타시아의 이런 말이었습니다. 선생도 기억하실 겁니다. 이렇게 말했지요: << 세상에 그 누가 육욕만의 결과로서 이 세상에 나오고 싶을까? 누구든 위대한 사랑의 절정에 창조의 열의(熱意)로 지음을 받고 싶지, 육정의 열매로 세상에 나길 바라지는 않아.>>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바로 육정의 열매로서 세상에 태어납니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원해서 섹스를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잉태를 했는지 나는 모릅니다. 아내가 임신을 해서야 난 아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아나스타시아는 친밀한 관계 이전에 일정한 상태와 열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의 동료는 아나스타시아의 말에서 나보다 더 많은 걸 이해했나 봅니다. 더 많은 걸 느꼈던지. 그 사람은 이 상태를 체험해보고 싶어했어요. 아이가, 아들이 태어났음 하고 바랐죠. 내 동료는 사십이 넘는 나이고요, 아내는 그 보다 두 살 연하입니다. 그 부부에겐 두 아이가 있어요. 최근 년에는 부부 사이에 섹스 횟수가 드물었다고 그는 실토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내한테 아이 얘기를 꺼냈죠. 아내는 그의 소원에 매우 놀랐어요. 아이를 낳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말했죠. 하지만 남편을 대하는 태도는 좋은 쪽으로 변했어요. 나의 동료는 아나스타시아의 말이 담긴 책을 아내가 읽게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먼저 얘기를 꺼내더래요.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한 건 아니고, 책에 쓰인 내용이 얼마나 사실인가 하고 알고 싶다고요. 그러던 어느 하루 밤 동료는 아내를 다정히 애무하기 시작했어요. 이때 그의 생각은 섹스가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아들에 있었죠.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차이라면, 선생은 아나스타시아가 이끌어서 그 상태가 되었다면,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 해냈던 것이지요. 그리 된 것이 우연인지 아닌지는 가리기 어렵지만, 그가 바로 그런 상태에 도달했음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사실인 것 같아요. 그의 아내도 그를 마찬가지로 부드러움으로 대했으니까요. 이 부부는 젊지 않아요. 젊어서처럼 강렬한 성적 충동을 느끼지는 못했죠. 태어날 아이 생각으로, 섹스 테크닉에 대한 생각은 뒷전으로 물러났을 겁니다. 그 결과 그 결과 <<그 무엇>>이 일어난 거에요. 나의 동료도 그의 아내도 친밀한 관계의 세부(細部)를 기억하지는 못해요. 그건 선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선생처럼 다음 날 이른 아침의 잊혀지지 않는, 훌륭한 느낌에 대해서는 얘기합니다. 동료의 말로는, 그와 비슷한 느낌을 한 번도, 아내나 다른 여럿의 어떤 여자와도 느껴본 적이 없답니다. 그의 40대 부인은 지금 임신 7개월 째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아내가 다시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죠.

- 누구하고?

- 자기 남편이요, 블라지미르 니콜라예비치, 상상해보세요. 과거에는 불평 많고 까탈스러웠던 여자가 지금은 가끔 병원으로 찾아와서는 자기 남편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거에요. 복도에 앉아 기다리는 모습이 사랑에 빠진 소녀에요. 그녀 모르게 간간히 난 그녀의 표정을 살펴보았죠. 얼굴 표정도 바뀌었어요. 보일락말락 한 은밀한 미소가 맴돌아요. 난 이 가족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죠. 8년 됐습니다. 살이 뚱뚱하게 찌고 침울했던 여인이 갑자기 10년은 젊어졌어요. 임신한 티가 확 났지만 아름다워졌어요.

- 그 동료 분의 아내에 대한 태도도 변했나요, 아니면 그대로인가요?

- 그는 사람이 변했어요. 전에도 오용을 한 건 아니지만 술 담배를 입에서 딱 떼었어요. 이제 그와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는 그림 그리기 입니다.

- 그림 그리기요? 무슨 그림을 그리는데요?

- 아나스타시아가 얘기한 자기들의 미래의 가원을 그립니다. 땅을 사서 거기에 짓고 싶어해요 아 제 표현이 잘못되었군요. 집을 짓는다는 게 아니라 장래 자기 아이들을 위해서 조그마한 가원의 기초를 놓으려고 합니다.

- 장래의?

- 그래요. 장래의. 그의 아내는 딱 한가지를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나스타시아가 얘기한 대로 자기들이 손수 짓고, 임신 기간 내내 머물러야 하고, 출산을 해야 하는 가원-사랑의 공간에서 수태가 되었어야 하는데 아파트에서 그랬다는 게 애석한 것이죠.

동료의 아내는 아이를 하나 더 낳을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어요. 동료도 그걸 믿고 있고요.

저는 확신합니다. ()를 이으려는 짐승의 본능이 사람의 본능과 차이라면, 짐승은 단지 자연의 부름에 따라 짝을 짓는다는 점입니다. 소위 섹스라는 걸 하는 사람은 동물에 근접한 것이죠. 그렇게 해서 태어나는 아이는 반()사람-()짐승입니다.

참사람은 함께 지음에 있어 오직 사람한테만 내재하는 사랑, 앞 일을 예견하는 능력, 지음에 대한 인식 등등의 에너지와 감정이 참여할 때에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섹스>>란 말은 여기에 맞지 않아요. 그건 이 행위를 저속하게 하는 것이죠. <<함께 짓기>>란 말이 더 적당합니다. 남녀가 <<함께 지음>>이 일어나는 상태에 돌입하면, 그 때 둘 사이에는 하늘의 혼인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 유대(紐帶)는 종이 쪽지와 의식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무언가 크기를 잴 수 없이 크고 의미 있는 것이 그 유대를 맺어주기 때문에 튼튼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또한, 그런 유대가 젊은이들한테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 동료의 예는 그것이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러한 유대는 아나스타시아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 그럼 이게 어떻게 되는 거죠? 신분증에 혼인등록이 된 사람들 모두, 실제로는 혼인관계가 아니란 말씀인가요?

- 신분증의 도장은 사회가 고안해낸 조건일 뿐입니다. 종이 쪽지나 온갖 의례는 시대마다 인종마다 다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 인위적으로나마 둘 사이의 유대관계를 눈에 보이게 하는, 심리에 대한 작용 정도의 시도였습니다. 아나스타시아는 그 점을 정확히 지적했습니다. 이렇게 말했죠: << 거짓 결합은 무서워. 아이들, 블라지미르, 아이들은 그 결합의 허구, 부자연스러움을 몸으로 느껴. 그래서 부모가 하는 모든 말을 의심하게 돼. 아이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벌써 거짓을 무의식적으로 느껴. 또 그 때문에 안 좋아져. >>[2]

그런데 알고 보니,



[1] 1 71

[2] 1 72

'아나스타시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1장 끝  (0) 2007.12.12
1장 계속4  (0) 2007.12.10
1장 계속2  (0) 2007.12.04
1장 계속  (0) 2007.12.03
자녀 교육  (0) 2007.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