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알고 보니,
자연에는 비(非)인위적이고 자연스러운, 그리고 신성한 혼인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걸 얻을 수 있는지도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고요.
- 그러니까, 혼인상태에 있더라도, 도장이 찍힌 신분증이 있더라도, 자신의 남편 또는 아내와 다시 혼인을 해야 한다 이 말인가요?
- 다시가 아니라 진짜로 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죠.
- 사람들이 그걸 이해하기는 쉽지 않겠는데요. 어디서나 섹스를 최고의 만족이라 여기고 있어요. 누구든 만족을 얻기 위해 그걸 하고요.
- 그건 모두 다 거짓입니다, 블라지미르 니콜라예비치. 90%의 남성이 여성을 만족시키지 못해요.
많은 사람들이 섹스에서 최고의 희열을 얻는 다는 신화는 심리적 세뇌의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성적 욕구는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어요. 산더미처럼 쌓인 합법적, 비합법적 포르노 잡지는 돈 더미입니다. 이것들이 사람의 머리를 어지럽게 합니다. 슈퍼맨이 나와 모든 여자를 숨 넘어가게 하는 영화도 비즈니스입니다.
상대방이 자기한테 맞지 않는 짝이라고 시인하기가 두렵고 주저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실은 사실인 것이죠. 맺어지는 혼인의 60% 정도가 깨집니다. 그렇다고 나머지 40% 완벽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요. 부부간의 계속되는 부정, 창궐하는 매춘이 그 증거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섹스에서 느끼는 만족은 온전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둘이 진정한 “함께 짓기”에서 얻을 수 있는, 그리고 사람한테 내재하는, 만족의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함께 짓기”는 사람의 신성한 소명인데 우리는 그것을 평생 헛된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번지수가 틀렸어. >> 이 말이 참임은 우리 삶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우리시대의 역사학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대의 어떤 문명을 대표하는 아나스타시아는 기존의 정형(定型)을 산산이 깨부숩니다. 이 문화의 놀라운 수준은 임신한 여인에 대한 태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문화에서 임신한 여성은 수태한 곳에서 아홉 달을 보내야 하고 출산도 그곳에서 합니다. 그게 중요할까요?
현대과학이 갖고 있는 정보 및 비교분석을 통하면, 그런 주장이 탁월함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수태하고 임신 내내 머물러야 할 곳이 가원이라 했습니다. 남과 여는 그곳에다 손수 온갖 식물을 심어 동산을 가꾸었습니다. 생리학자들은 임신한 여성이 옳게 식사해야 함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학술서, 인접한 학문의 학술서는 적지 않지요. 그래서 결과는 어떤가요? 임신한 여성 모두가 그걸 공부해야 하나요?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학술서를 열심히 공부해야 하나요? 뭘 어떻게 어떤 음식으로 섭취할까 하고? 상상하기 어렵죠.
설령 모든 여성들이 이런 학술서를 공부했다 해도, 반드시 봉착하게 되는, 풀기 어려운 난제가 있습니다. 권장하는 식품을 어디서 구하느냐 하는 것이죠.
부유한 현대의 한 가정 부부를 상상해보죠. 물질적으로는 부유해서 뭐든 원하는 걸 살 수 있습니다. 그런가요? 허구일 뿐입니다. 못합니다. 또한 임신한 여성이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걸 살 돈도 없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돈을 주더라도 자기 동산에서 따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예를 들자면, 사과와 품질이 비슷한 걸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음은 심리적 측면입니다. 생리적인 측면보다 덜 중요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상황을 연상해서 비교해 보지요.
첫 번째는 일반적인 대부분의 경우의 상황입니다. 소득 수준이 평균 또는 그것을 약간 상회하는 젊은 가족을 예로 들기로 하죠. 임신한 아내가 남편과 함께 아파트에 삽니다. 이 여성이 질 좋은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 못합니다! 고급 슈퍼마켓에서도 품질이 좋은 식품을 구할 수 없습니다. 통조림, 냉동식품은 사람한테 부자연스럽습니다. 재래시장은? 거기서도 식품은 좋게 말해야 의심스러운 지경이죠. 텃밭을 가꾸는 소농조차도 식물 재배에 온갖 화학물질을 사용할 줄 압니다. 자기 먹을 거 재배할 때는 다르지만, 팔려고 할 때는 소득 욕심에 온갖 성장촉진제를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누구나 알 고 있는 사실이고, 때문에 출처가 의심스러우면 섭취하는데 불안하지요.
불안! 불안이 현대인을 계속 따라 다닙니다.
임신한 여성한테 끊이지 않고 사회문제, 자연재해 소식이 날아듭니다. 여성의 의식, 무의식에는 미래의 자식 걱정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긍정적인 것들이 어디, 어떤 게 있나요? 우리 스스로가 멍에를 지는 참혹한 생활 여건에서는 그런 게 없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잘 단장된 아파트에서도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지고 새것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합니다.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낡고 부서진다는 점을 수긍하게 되고, 또한 수도관의 물을 마실 수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입니다. 임신한 여성은 문득 이런 모든 사실을 선명히 느끼는 것이죠. <<혹시나>>하고 바라는 것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막막한 상황에서 그녀가 기댈 수 있는 건 그것뿐입니다.
두 번째 경우입니다. 아나스타시아의 표현대로, 사랑의 공간에 에워싸인 여인은 생리적 욕구의 만족 이외에도 강력한 심리적 지원을 받습니다.
현대과학은 아나스타시아가 얘기한 거의 모든 주장이 옳음을 해명하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주장들은 아주 단순하고 논리적입니다. 똑똑한 말을 수없이 해대는 우리가 왜 거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아나스타시아의 말 중에는 현대과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수수께끼 같은 현상도 있습니다:
<< 부모는 자기가 창조하는 것에 主三點, 즉 존재의 세 차원을 제공해야 해. >>[1]
이어지는 그녀의 설명입니다. 수수께끼 같은 존재의 세 점이 한 곳에, 즉 가원에 모이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 사랑하는 두 사람의 생각이 합일하는 곳에… 제1점은 “부모의 생각”이야… 두 사람이 훌륭한 창조를 생각하며 두 몸이 하나가 될 때, 두 번째 점,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 차원이 하나 더 생겨. 이때 하늘에선 새 별이 하나 밝게 빛나는 거야… 세 번째 점點 - 새 차원이 그 곳에서 생길 거야. 아이가 잉태된 곳에서 출산도 해야 해. 아버지는 곁에 있어야 해.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셋 위에 위대한 화환을 내리실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