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원家園

한봉이냐 양봉이냐?

haanbs 2007. 6. 7. 10:58

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이상 콘텐츠를 노출 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보기


한봉이냐 양봉이냐?

 

우리 토종 한봉은 스스로 알아서 집짓고 꿀모으고 자손 번창케 한단다. 꿀 값도 비싸고 사람 손도 덜 타고 주변에서 다들 이거로 하란다. 나도 그렇고 싶었다. 우리 동네에 두 집이나 이 토종 한봉이 빈 벌통에 저절로 들어와 살고 있고 내 눈으로 확인도 했다. 그런데 기다리자니 하세월이다. 아나스타시야 표 벌통에 꿀을 발라도 보았지만 개미 새끼들만 분주하게 움질일 뿐 벌은 근처에도 없다.

"양봉은 집을 짓지 못하고, 꿀을 생산하는 것보다 먹는 게 더 많아서 특히 장마철에는 더 그러하여 스스로 자멸하고 말아" - 연천군 농업기술센터에서 소개시켜준 연천군내 최고의 양봉 전문가의 권위있는 말씀이다. 전화를 했더니 친절히 가르쳐주며 동지를 만난 듯 반겨주셨다.

 

난 선택의 귀로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에 놓이게 됐다. 게다가 지금은 벌을 분양 받아야 하는 제철이 아닌가. 봄에는 아카시아 꿀을 딴다고 벌 값이 비싸 못 사고 있었는데 이젠 그 명분도 없어지고 말았다. 이제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이다. 오늘은 현충일. 비장한 각오로 결단을 내렸다. 사자! 양봉으로. 이것 외에 오늘은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이 없다.

 

미리 알아둔 원당3리 양봉 아저씨한테 전화를 때렸다. 그분 왈, " 마침 어제 분가해서 따로 받아 놓은 한 통이 있는데 기세도 좋고 벌도 무척 많아. 가져가. 당신 자식들한테 양봉을 가르치려 하는데 배우려하지 않는단다. "그 전에는 벌 한 통을 논 한 마지기하고도 안 바꿨어. 젊은 사람이 배운다 하니까 좋은 일이라서 열심히 해보라 좋은 벌을 주는 거여. 내년에는 두세 통으로 늘어날 수 있어."
벌 이사 가는 시간은 저녁 6시로 하자고 했다. "그 때쯤 되어야 나갔던 벌들이 돌아오니까"

 

저녁 시간이 되서 나는 다시 양봉장으로 갔다. 아저씨는 내가 전화를 하고 5분이 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어"  드디어 벌통을 옮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웅웅왕왕. 양봉장은 그야말로 오사리 잡판, 혼돈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벌들이 날아드는 마당에 나도 망사를 뒤집어 쓰고 들어갔는데... 그 복잡한 교통 체증 속에서 한 마리의 벌도 내 몸에 부딪히지 않는다. 신기하네...


생각보다 쉽게 벌통 하나가 내 자동차 트렁크에 실렸다. 한 2km 정도 달려서 아나스타시야 표 특수제작 벌통에 도착했다. 내가 벌통을 들고 앞선 아저씨를 따라 야산에 오르니 아저씨 왈,

 

- 이거 벌을 어떻게 털어넣으려고?
- 그냥 털어넣어요.
- 그러면 안 되지. 아래로 흘러 나올텐데. 벌통을 일단 꺼꾸로 세웠다가 다시 제자리로 놓자고.

 

벌통을 잡아 앞 쪽을 밑으로 기울이고 아저씨가 벌을 털어넣기 시작했다. 웅왕웅왕. 정신이 없다. 신기한 것은, 한 마리도 쏘질 않는다. 바지 가랭이 속에 들어간 듯도 한데 따끔하게 쏘지는 않는다. 아저씨는 슬슬찰찰 계속 벌을 털어넣었다. 사방에는 붕붕방방 온통 벌 천지다. 이 일에 고작 십 분도 안 걸렸다. 좀 허탈하기까지 할 정도로. 그렇게 벼르고 벼렀던 일인데.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양봉 전문가께서 털어놓는다.

 

- 벌통이 저래서 들어가 살 것 같지 않아.

허걱! 그럼 난 어쩌라구요.

- 그래도 할 수 없어. 이게 다 배우는 거야. 딴 데로 날아가버릴 수도 있고. 암튼 내일은 설탕물 진하게 타다 주라고. 난 이십 년 양봉 해보지만 저런 벌통은 처음이야. 글치만 양봉도 스스로 꿀집을 만들고 꿀을 모아 둘 지도 모르지. 잘 해보라구.
- 벌도 무슨 병을 앓는다면서요? - 내가 물었다.
- 내 벌통은 일년에 두번 진딧물 약을 주는데 저 벌통은 그것도 안되겠는 걸. 실수가 다 배우는 거야. 처음엔 나도 돈 많이 날렸어...

난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거금 8 만원을 들여 갖다 놨는데 다른 곳으로 새면 어쩌나? 또 8만원? 또 날아가버리면? 꿀 한 조각, 꽃 한 다발을 아나스타시야 하라는 대로 안 갖다 놓은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속 편하게 마음 먹자. 내일 아침 꿀을 갖다 놓아야지...

 

다음날 아침, 2007년 6월 7일 아침 6시. 날이 흐려서 그런지 좀 어둡다. 기대 반 걱정 반 드디어 내 꿀통에 올랐다. 아뿔싸!!!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한 정적.

쥐새끼 한 마리는커녕 벌이 한 마리도 안 보인다. 가슴이 철렁. 이제 틀렸다. 크..일이다. 아까버라. 그 동안 수고의 댓가는?! 에이 날 샜다! 체념한 마음으로 벌통 문을 따기 시작했다. 틈새가 벌어지는데 그 속에 벌 떼가 새카맣게 나를 쳐다본다!! 난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져간 꿀을 한 술 듬뿍 퍼서 벌통 입구, 그러니까 벌의 이착륙 활주로에 척 발라 문지렀다. 벌이 한 두마리 어디선가 나와 꿀에 입을 댄다.한 시간여 지나자 꿀은 흔적도 없다. 꿀을 빼먹고 남은 밀납 찌꺼기는 벌이 수도 없이 달라붙어 물이 흐르듯 흐르며 아래로 굴려 떨어트려 버린다. 청소를 하는 모양이다. 몇몇의 벌들은 벌통 주위 약 20여 미터 거리를 정찰비행한다. 또 어떤 놈들은 벌통을 세세히 살펴 보고 들어가 본다. 벌통이 이상하게 생겨먹은 고로 여기서 과연 둥지를 틀만한가 조사하는 것일 게다. 여왕벌이 수집된 정보를 종합하여 결론을 내릴 거다. 내일 쯤이면! 부디 떠나지 말고 남아서 행복하게 살아다오!
 

'가원家園'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차, 가원(1)  (0) 2007.06.21
장과류, Berries  (0) 2007.06.20
임진강  (0) 2007.04.26
아나스타시야 벌통의 기적 아니면 생 고생?  (0) 2007.04.16
넓은 아량  (0) 2007.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