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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미국기차 Amtrak

haanbs 2007. 3. 26. 22:48

코끼리 미국기차 Amtrak

 

시애틀은 위도 상으로 보면 만주벌판만큼 추워야 할 듯 한데 춥지 않다. 3월인데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땅 밑에선 풀들이 용트림을 한다. 부슬부슬 비 오는 날은 많다. 따뜻한 멕시코 만류가 올라오면서 비를 몰고 온다. 기온은 높은 편인데도 그래서 으슬으슬하다.

 

스산한 시애틀을 벗어나 햇빛 쏟아지는 남쪽으로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샌프란시스코, 산호제로. 내친 김에 미국이라는 나라의 크기도 몸으로 느껴볼 겸,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과 실제의 미국을 대조도 해볼 겸, 겸사겸사 해서 비행기 대신 미국철도기차 Amtrak을 탔다. 이 녀석은 미국 음식점에서 나오는 콜라 잔만큼이나 덩치가 크다. 2층이다. 서둘러 올라타서 동행인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차표를 사는데 인터넷에서 예고 가격을 보고 싸다 생각했었는데 승차는 얼마, 거기다 식음료다 담요 값이다 해서 배보다 배꼽이 크다.

 

암튼, 부푼 내 맘과 몸을 싣고 덩치 큰 코끼리는 시애틀을 스르르 미끄러져 산호제로 향한다. 시애틀을 벗어나자 심심치 않게 들판이 나타나다 사라진다. 철도 변을 따라 땅을 얼마씩 끼고 농가들이 한적하다. 땅 넓이는 집 주변으로 대충 일이천 평 정도나 될까. 그곳에 말을 2마리도 좋고 대여섯 마리까지 키운다. 취미로 키우는지 시골 살림에 도움이 될는지 차 안에서 알 수는 없건만 승객 중 한 사람에게 물어보니 좋은 말 한 마리에 5천불은 줘야 한단다. 그 아래도 허다하게 부지기 수고. 물론 켄터키 더비에서 뛰는 말은 부르는 게 값이다. 하기야 제주도에서도 미국산 족보있는 말을 들여다 키우는 농장을 여섯시 내고향에서 인가 본적이 있다.

 

아나스타시야를 읽고 가원(家園)을 지을 꿈을 갖고 산다. 꿈 같은 가원은 5년이고 10년이고 넉넉한 마음으로 다가가면 바로 이룰 수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당장 오늘 내일의 조급한 마음에 휘둘리다 보면 혹 이거 신기루 아니었던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낭만주의적 몽상아닌가 하고. 그럴 때마다 난 가원의 실물경제를 셈하곤 한다. 사실, 나의 셈과 가원의 디자인은 지금도 계속되는 진행형이다.

 

말을 키워보고 싶단 생각도 이 연장에서 하고 있었다. 딸 아이가 아빠 말 사줘란 얘기를 벌써 오래 전에 했었고, 난 주책없이 알았어하고 말았다. 말을 한 두 마리 키워서 타 보기도 하고, 나를 찾는 친구들을 대접하면 근사하겠다 생각했었다. 새끼 나면 팔아서

미국 사람들 보니 땅도 그리 크게 쓰지 않는 것 같다. 대신 건초를 많이 사야겠지?! 비쌀 텐데 이런 생각의 흐름을 타고 꿈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가는데 코끼리 Amtrak이 멈춰 서서 꼼짝 않고 꿈적이지 않는다. 특별한 안내방송도 없다. 승객 중에는 젊은이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시골의 행색과 하나도 틀릴게 없다. 기차장의 안내 방송이 울린다. 무슨 인베스티게이션이 어쩌구 저쩌구 잘 모르겠다. 다른 승객들도 모르는 눈치. 한 시간은 제자리에 서서 꿈적이질 않는다. 차창 밖에는 여지없이 봄이 오고 있었다. 하늘 높게 치솟는 침엽수에서, 큰 기둥을 여러 갈래 풍성이 뻗은 활엽 목의 잔가지에서, 들딸기 블랙베리의 관목에서 봄의 활기는 초록색 망울을 맺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기다린다. 점심식사를 알리는 방송. 식당칸에 모인 사람들이 웅성인다. 빨간 머리의 스코트란 친구가(드물게 젊은) 알고 싶지 않겠지만하고 운을 떼고는 한 여자가 기차 밑으로 뛰어들었다 한다. 사고 처리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한 사람의 죽음도 기차의 걸음을 아주 막지는 못하고 코끼리 암트랙은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차창 밖에는 연실 넘실대는 짠물 호수가 우리를 따라온다. 아님 우리가 따라가는 건가?!

 

차창 밖에는 시냇물이 어디론가 흘러내리고 시골 인가가 몇 채씩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다. 그러다 결국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구나 하는 서운한 감정과 동시에 역시 미국 네놈들도 할 수 없구나 하는 고소한 마음을 같게 하는 장면들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동네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냇물들은 시커먼 오수로 냄새가 날듯하고 좁은 강물은 달리는 기차에 뒤쳐지지 않게 달려 금새 금새 큰 강을 이룬다. 큰 강에 합쳐지면 물은 다시 영롱한 하늘을 머금는다. -.

 

기차길 따라 썩은 폐차도 많고 녹슨 농기계도 산더미다. 더미 더미 쌓아 놓은 쓰레기에서는 미국의 풍요와 동시에 세계에서 최고의 Co2 생산량을 배출할 수밖에 없고, 교토의정서에 서명할 수 없는 미국의 두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세계를 주름잡는 미국도 이렇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고 있다.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고 자국민 한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수십 수백의 목숨을 희생한다고 자랑스러워하는 미국. 그러면서도 지금 이라크에서처럼 수십만 명의 목숨을 남이라면 괜찮은척하는 나라. 하기야 이게 미국만이 모습일까. 세상이 관계와 관계의 그물코라면 나도 그 한 코를 이루고 있는 걸

 

얼마를 더 지나니 땅거미가 내리고 태평양 연안을 따라 뻗은 산중에 접어들었다. 하늘에 별은 총총하기만 하다. 한참을 밤하늘을 응시하다 의자를 납작하게 펼쳐서 잠자리를 만들었다.

 

덩크덩, 덩그덩, 덜크덩 덜그덩

 

검푸른 어둠이 동쪽 벌판에서 몰려오는 빛에 밀려 삭으러 들고 새날이 밝았다. 어디선가 시작되었는지 양쪽의 큰 산맥들 사이에 폭이 수십킬로는 족히 돼보이는 대 평야가 아스라히 펼쳐져 있고 기차가 달리고 달려도 끝을 모른다. 거무퉤퉤한 땅에는 생전 처음 보는 알몬드, 피스타치오 등등의 과일 나무가 종횡 질서 정연하게 도열하여 봄기운을 뿜고 있다. 이 들판에서 코끼리는 다시 한 참을 서있다. 안내 방송인즉 몇 킬로나 되는 나무 교각이 불에 타서 소실되었고, 복구작업은 5월이나 되야 수습될 것이니, 100마일의 우회 길을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사정인데, 남북에서 몰려 오는 화물차량에 길을 양보해야 하니, 사정을 헤아려 조급해 하지 말고, 담배 피우면 다음 역에서 경찰이 대기하다가 재미없게 할 거란 윽박과 함께, 무작정 기다릴 것을 당부했다. 차는 그렇게 이미 5시간 이상을 연체하고 있었다. 그래도 과수원 너른 한 들판에 있으니 좀 나았다. 배나무인지 뭔가가 하얀 눈 발을 날리며 찬란한 햇빛에 살랑거렸다. 여기는 캘리포니아주 과일 단지란다. 코끼리는 싫은 듯 억지로 떠밀려 일어나 다시 달린다. 이젠 창 밖으로 우리나라 농민들에 걱정을 안겨주는 캘로포니아 캘로스 쌀 생산 들판이 보인다. 사진을 몇 장 컷 컷 컷.

 

원래 시애틀에서 산호제까지는 24시간 거리인데 우리는 7시간을 더 걸려 왔다. 기차에서 제공한 음식은 러시아 시골 간이식당의 음식과 하나도 차이가 없었다. 코끼리는 지나는 화물차에 굽신 굽신 길을 내주기 일쑤고, 연착은 오늘 만의 일이 아니라 이미 습관이 된지 오래인 듯하다. 미국의 동서남북을 힘차게 달리던 암트랙이건만 여생을 이렇게 마감하고 있다. 미국 연방정부에서는 불어나는 적자 때문에 이 코끼리를 이미 오래 전에 푸줏간에 보내고 싶어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건 납세자들의 향수를 코끼리가 업고 달리기 때문일 거다. 그렇게 사라지던가, 아니면 우리나라 KTX처럼 새 전략을 마련해서 생존하겠지. 로마제국이 천 년의 장구한 세월을 건장한 청년으로 지내면서도 결국은 사라졌듯이 암트랙도 사라지리라. 영원한 것은 없나. 아나스타시야의 말처럼 사람이 지은 인조의 것은 결국 썩고 고장 나고 버려지는가 보다.